20080806w: 고린도후서 강해 22 (고후 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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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6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22
본문: 고후 12:11-21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 사도권을 변호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복음사역에서 있었던 일을 많이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은 졸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고 했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선교여행 하면서 겪은 숱한 고난과 마음 고생을 다 자랑했습니다. 또한 14년 전의 삼층천에 다녀온 신비체험까지도 말했고, 몸의 가시를 위해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도 고백했습니다. 이 모든 자랑을 고린도 교회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바울)를 너무 흉보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은 자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14년 전의 신비체험을 이제 와서 자랑했습니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바울에게 당신은 사도가 아니라고 하니까, 나도 신비한 영적 체험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고생한 것을 말한 것은 자기가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결국 바울은 다른 어느 사도보다 자신이 부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2절에서 ‘사도의 표’를 말합니다. 즉 사도의 증거물을 제시하는데,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바울이 사도됨의 물증으로 제시하며 자랑한 것이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토록 바울은 작심하고 자기가 사도임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다른 사도와 비교할 때 굳이 다른 것이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가 있는데, 너희(고린도 교회)에게 경제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은 것뿐이라고 합니다. 13절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이게 내 약점인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용서 좀 해달라는 겁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이것을 빌미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바울이 선교비를 받지 않은 것은 그가 무자격자이기에 무급으로 사역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사도권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것이 흠이라면 용서하라는 겁니다. 바울은 내가 무자격자기이게 무급으로 일한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은 14절에서 예까지 들어가며 변호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해 저축하지 않고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해 저축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부모라는 겁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이것을 빌미로 나의 사도권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세 번째 방문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너희에게 부담을 지울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것으로 또 나를 핍박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다 너희에게 덕을 끼치려고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로 너희에게 배척을 당하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14절). 이것은 바울의 입장이기 이전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요구입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은 피에 굶주린 신도 아니고, 짐승의 고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양을 바치는 것은 우리의 피와 살을 대신하는 겁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우리 대신에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돈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헌금하되 우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드리는 방편으로 짐승의 피, 고기, 물질,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재주가 없어서 우리의 재능을 원하시겠습니까. 다 우리를 드리는 방편일 뿐입니다. 그때그때 우리를 드리는 모양새가 다를 뿐입니다. 어떨 때는 시간으로, 어떨 때는 짐승의 피로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도 당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모함하고 대적하고 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16-18절입니다: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겉으로는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교활하게 뒤로는 다 챙겼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흥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디도가 그런 짓을 하더냐? 디도와 함께 보낸 형제들이 그런 짓을 하더냐?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질 문제를 갖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마음 고생을 많이 하게 했습니다.
19절 하반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자비량 선교를 하는 것은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니 부디 오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3차 방문을 앞두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서로의 기대치가 맞지 않을까봐 두렵다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을 앞두고 착잡한 심정입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또 바울은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라고 합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이번에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두렵다고 합니다. 또한 여전히 사람들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하고’ 있을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사실 교회는 바울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교인들과 목회자의 관계도 그렇고, 교인들의 개인적인 한계와 모순도 그렇고, 목회자의 교회에 대한 기대나 경계심도 시차는 이천년이 나지만 다 비슷합니다. 과거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아픔이 우리에게 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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