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11w: 고린도후서 강해 14(고후 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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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1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14
본문: 고후 8:9-15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지난 주에는 8장 1절 이하를 살펴 보았는데, 그 주제는 “연보”입니다. 오늘 주제도 “연보”이고 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이 주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깨우친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산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는 취지에서 고린도 교회도 참여를 종용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모범을 제시했는데,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행위를 알려주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넉넉한 중에 연보한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과 시련, 극한 가난 중에도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합니다. 힘껏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는 힘에 넘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마게도냐 교회를 자제 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범으로 고린도 교회에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연보에 대해 바울은 ‘드리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은혜라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연보를 두고 ‘드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받는 은혜보다 드리는 은혜가 더 소중합니다. 이 ‘드림의 은혜’에 성실하고 풍성하라고 당부합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오늘은 헌금의 역할, 기능, 사회적 효용성입니다. 우리는 연보를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 이상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내는 헌금이 어떻게 집행되며 관리되는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신앙고백 행위이고,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드린 헌금이 잘못 집행되어도 엄밀히 말해서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드린 헌금은 일단 하나님께 접수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간에 헌금사고가 나도 내 책임이 아닙니다. 한 예로 헌금을 속아서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부흥회 때 부흥사가 감정적으로 자극해서 얼떨결에 작정헌금을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 순간의 순수한 내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겁니다. 나를 기만한 사람의 책임이지 나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드린 헌금이 어떻게 관리되느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싶으면 헌금을 안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않고, 자기가 결정해서 스스로 집행하기도 합니다. 구제헌금에 쓰거나, 선교헌금을 보내거나, 시골의 미자립 교회를 돕는 데 씁니다. 교회의 헌금관리를 믿을 수 없어 내 스스로 관리하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헌금을 드리기 위해 뗐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내가 헌금을 떼는 순간 교회의 공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떼면 그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교회가 헌금을 제대로 관리 못하면 그 교회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 문제이지, 개인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내 스스로 헌금을 관리한다면 그것은 공금유용입니다. 물론 교회가 헌금을 제대로 관리 못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헌금관리를 불신하여 내 스스로 관리하는 것은 교회가 잘못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데 동참시키기 위해 헌금의 사회적 용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부유하신 분인데,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14-15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특히 15절은 구약의 만나에 대한 말씀입니다. 연보는 하나님께 대한 내 감사의 표현이고, 내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우리 공동체와 사회를 평균하게 하는 데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초대교회는 연보의 90% 이상을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구제가 무엇입니까? 그 공동체를 평준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입니다. 소외자가 생기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연보의 거의 전부를 구제에 사용한 것입니다. 분배를 균등하게 하는 데 썼다는 겁니다. 이것이 원래 연보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연보가 신앙고백이고 감사의 표현이지만, 집행 과정에서는 공동체를 평준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헌금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사회적 약자가 보호되고, 공동체가 균등해지지 않습니까. 건강한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평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연보가 바로 이 기능을 했습니다. 주님은 원래 부요하신데 자기의 부요함을 다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독일은 사회계층 간의 격차가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굳이 대학을 가야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공부에 취미 없는 사람은 일찍부터 실업계 학교로 갑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서도 굳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면 안 갑니다. 실업계 출신이라도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갑니다. 정말 공부가 적성에 맞고 취미가 있는 사람만 대학에 갑니다. 왜 굳이 진학을 안 해도 되느냐면, 대학 나온 사람이나 일찍 사회에 진출한 사람이나 최종적인 수입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일찍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은 봉급이 적지만 세금을 적게 냅니다. 나라의 혜택으로 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늦게 사회에 진출해서 봉급은 많지만 그동안 국가로부터 받은 투자금을 세금으로 회수당합니다. 이렇게 독일 사회는 평준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층 간에 위화감이 없습니다. 독일은 세금으로 사회의 평준화를 유지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평준화 시킬 수 있을까요? 헌금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의 취지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까? 요즘은 헌금이 역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헌금으로 구제를 해야 하는 데 자기에게 투자를 합니다. 자신을 더 크게, 더 아름답게, 더 화려하게 하는 데 헌금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빈익빈 부익부를 더 부채질 하는 것입니다. 헌금으로 구제를 하면 오히려 격차를 좁힐 수 있는데 자기에게 투자하기에 그 격차가 심화되는 겁니다. 헌금이 역기능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교회를 욕합니다. 헌금은 우리 사회를 평균케 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헌금은 공동체를 평균케 하는 구제비로 사용되어야 맞습니다.
모(母)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연보의 취지에 걸맞게 고린도 교회도 십시일반으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원래 부요하신 분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고 연보의 본래 취지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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