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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4w: 히브리서 강해 22 (히 11:20-26)

2009년 2월 4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22
본문: 히 11:20-26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자들의 영원한 사표요 조상입니다. 그는 이스라엘만의 조상이 아니라 아랍인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믿음 계보에 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공부한 대목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이 이행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새벽같이 일어나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한 마디 이의제기도 없이 그는 하나님이 분부하신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은 추호도 머뭇거림이나 갈등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이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장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높이 사신 부분이 바로 ‘순종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저급한 단계에서도 아브라함은 순종을 잘 했습니다. 하나님이 ‘고향과 형제,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도 그는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고대 시대에 고향을 떠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데도 말입니다. 이제 독자 아들을 각을 떠서 불살라 바치라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게다가 아들을 잡아 바치라고 지시하신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이나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어 길을 나섰다 하더라도, 사흘이면 얼마든지 회의에 빠질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변화가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초지일관의 신앙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당도합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위에 이삭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칼로 이삭의 목을 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쇼가 아니었던 겁니다. 실제로 이삭을 그렇게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의문은, 그때 아브라함의 정신이 온전했을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마지막 순간에 개입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쇼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만일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추호의 불신, 의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 앞에서 하나님이 두 손을 드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백세에 얻은 아들을 잡아 바치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길을 나서는 순종의 믿음, 사흘 길을 가면서도 추호도 변하지 않는 믿음, 내가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린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답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괜히 유대인들의 조상, 아랍인들의 조상, 우리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게 아닙니다. 누구도 아브라함의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을 마음 가운데 깊이 각인하는 그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이삭과 야곱을 지나서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45장에 나옵니다. 거기를 보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상태에서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온 형제들과 해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15절입니다.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의 믿음은 철저한 섭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이들의 인간사에서 우연은 없다는 겁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형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으며, 하나님은 또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도, 형들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에 보면 요셉의 혼이 감옥에 묶여 있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시편 105편 17-18절입니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러나 요셉은 결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왕의 술 맡은 장관을 만나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서 겨우 옥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어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만나고 있습니다(창 45장). 지금 요셉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어지는 8절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다 하나님이 계획하신바대로 나를 먼저 애굽에 보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요셉에게 꼭 배워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연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해가 되고, 수용이 되며, 용납이 됩니까? 욥은 하나님도 인정하는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욥에게 수많은 재앙이 닥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의주도한 각본이었습니다. 도대체 해석이 안 되는 혹독한 저주같지만, 주님의 자녀에게는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날아가는 참새가 한 마리 떨어져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참새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소양이, 영안(靈眼)이 없어서 그렇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다 담겨 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요셉의 경우를 당하면 벌써 자폭했을 겁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무얼 그렇게 모진 짓을 했다고 왕따 당하고, 죽임을 당할 번하고, 노예로 팔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 요셉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요셉을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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