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1w: 히브리서 강해 23(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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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1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23
본문: 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지난주에는 요셉의 믿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한 마디로 섭리의 믿음입니다. 오늘은 모세입니다. 24절은 “믿음으로 모세는” 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는 영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불가사의한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소명기사도 기적입니다. 바로와 싸우고 이스라엘을 구해내는 것도 기적의 드라마였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은 그의 말년을 이렇게 전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비스가 산에서 죽는데 그 죽음도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 시체를 감추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 종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을 보면 모세 이후로 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이런 위대한 생애와 기적적인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의 믿음이 그의 기적적인 삶을 가져왔다는 겁니다. 모세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모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본문을 보면 그의 믿음에 대한 몇 가지 단서가 나옵니다. 24절 하반절을 보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라고 합니다. 또 25절 하반절을 보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을 보면,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라고 합니다. ‘거절하고, 좋아하고,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의 믿음의 중요한 특징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무엇을 사양했습니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거절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예를 거절했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는 장차 애굽의 왕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신분과 지위를 사양한 겁니다. 주님도 마귀가 ‘내게 한 번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화를 다 주겠다’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추상같은 호령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지키려고 천하만국의 영화를 거절한 겁니다. 믿음은 이런 겁니다. 거절해야 할 것을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결단입니다. 포기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고 애매하게 끌려가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사람들은 구토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엘리야가 나타나서 ‘너희가 언제까지 양다리 걸치기를 할 거냐’ 라고 했습니다. 양단간에 결단하라는 겁니다. 신앙에는 완충지대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보십시오. 애굽의 종살이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셔서 출애굽을 시키십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짐승 같은 삶이었음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모두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나아간 겁니다. 그런데 애굽을 떠난 게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아직 노예근성, 거지근성이 남아있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광야 생활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것보다 더 고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탈출한 이상 애굽을 잊어야 하는데, 여전히 애굽에 대한 망령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은 했지만 가나안 입성에는 실패합니다. 신앙은 미련 없이 떠나고, 옛 삶과 단호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도 신앙의 발전이 없습니다. 옛 사람과의 결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영적 성숙이 없습니다. 언제 봐도 제 자리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의 지위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일말의 미련이 없었습니다. 이게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살고 종살이 하던 사람들도 애굽 생활을 포기 못했는데,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궁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애굽과 결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대단하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선택해야 할 것을 제대로 선택하며 결단한 사람이었습니다. 25절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성경은 언제나 버리고 거절하라는 소극적인 금령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것, 더 보배로운 것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지위를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이 더 값지고 보배로운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력, 지위, 배경을 분토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앞의 것을 잡으려고 그렇게 버렸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한 것도 잠시 잠간 누리는 죄악의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게 값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현란한 낙보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생하고 헌신하는 삶이 더 값지고 아름답다고 믿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함부로 살면 세상 낙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이런 삶보다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게 더 보배롭다고 판단하고 결단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러분, 모세에게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의 궁중에서 잠시 누리는 호화스런 삶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게 궁극적으로 더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애굽을 등진 것,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의 낙을 누리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세상의 가치관보다 더 나은 것이 있기에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원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고난의 삶입니다. 세상적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려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25절도 ‘죄악의 낙’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며 누리는 낙보다 세상살이 하며 누리는 낙이 훨씬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낙에는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잠시’입니다. 세상의 낙은 아무리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죄악의 낙이고, 그런 한 잠시잠간일 뿐입니다. 짜릿한 한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끝납니다. 잠시의 낙이 지나면 더 처절한 허무와 고통의 열매를 씹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런 죄악의 낙의 본질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고난을 택한 겁니다. 어떻게 낙을 버리고 고난을 택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낙을 버리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모세의 믿음은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입니다. 26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입니다. 모세는 사실 옛날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그 고난을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라고 합니다. 모세 자신이 나의 고난이나 수모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수난, 헌신, 고난, 봉사를 하나님은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 양보, 희생, 봉사, 헌신이라고 말입니다. 이러시면서 하나님은 보상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의식이 없다고 해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고난이라고 해석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영예롭고 복 된 일입니까? 주님을 위한 희생이나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다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모세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데, 그의 희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세가 애굽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고난을 택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다르게 신앙적인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겪으면 반드시 큰 상을 베푸실 것으로 믿었고, 그 상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살이 열심히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금은보화보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상으로 주신다는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은 세상이 주는 상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상은 안 받아도 받아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대단한 겁니다. 영원한 겁니다. 정말 값진 겁니다. 이 땅에서 받는 그 어떤 영예로운 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겁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 애굽으로 말하면 지금의 미국 이상으로 유일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재물, 영광, 보화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세는 그것 모두를 포기한 겁니다. 왜냐면 장차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지금 이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부디 하나님이 장차 내게 주실 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십시오. 바울도 그랬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잠시잠간 누리는 세상의 낙을 포기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모두 모세와 바울의 후예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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