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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w: 히브리서 강해 21 (히 11:3-19)

2009년 1월 28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21
본문: 히 11:13-19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3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이 사람들은 위에 등장한 사라, 노아, 에녹, 아벨 등의 믿음의 선각을 가리킵니다. 13절 하반절에는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자처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천국 시민이고, 천국이 본향이기에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나그네로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14절은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창세기 23장 4절을 보면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아브라함은 고백했습니다. 또한 야곱도 창세기 47장 9절을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며 고백했습니다. 다윗도, 베드로 사도도 다 자신을 나그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들은 나그네 생활을 어떻게 했습니까?

우선 그들은 현실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되 결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여관방이 아늑하고 쾌적해도 하룻밤 묵었으면 떠나야 합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여관방에 누워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듯이 말뚝을 박습니다만, 성경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왜 이 땅에 뿌리를 박습니까? 가야할 본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기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지금 객지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재가 유혹적이어도 우리는 여기에 뿌리 내리지 않습니다. 올해도 나그네 생활 충실히 하십시다. 14절 말씀처럼 나그네로 사심으로 여러분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내십시오.

그들은 간편하게, 순발력 있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들 모두는 언제든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떠날 채비를 갖추고 살았습니다. 짐 많은 나그네는 고역스럽고 미련스럽습니다. 나그네의 삶은 최대한 간편해야 합니다.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정장을 하거나, 등에 짐을 잔뜩 지고 어떻게 여행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먼데, 짐을 한가득 지고서는 갈 수 없습니다. 삶의 모습이 방만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도태되고 낙오합니다. 모든 짐을 다 주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가장 홀가분한 자세로 나그네 길에 나서야 합니다. 나그네라고 다 같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진도와 속도는 다 다릅니다. 몸이 가벼워서 벌써 고향 가까이 간 사람도 있고, 아직 고향이 아득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리석은 나그네는 길에다 자꾸만 투자를 합니다. 길에다 돈을 뿌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나그네는 한 푼이라도 천국 곳간에 저축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는 그저 가난하게 홀가분하게 사는 것이 지혜 있는 나그네입니다. 올해는 몸을 간편하고 가볍게 하십시다. 그래야 순발력이 생겨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데 그만큼 유리합니다. 영원한 본향인 천국은 그런 자들의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이 천국을 쟁취할 것입니다.

그들은 다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나그네는 오직 본향이 목표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본향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며 사는 게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나그네는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나그네 길에 닥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을 했지만 결국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110세까지 삽니다. 그러나 그는 유언을 남기기를, ‘나는 나그네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진군할 때 내 해골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 땅에서 죽으면서도 본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을 실향민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측은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실향민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본향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천국 시민권자들입니다. 이것을 한시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위대한 선각자들이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도 본향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거처가는 광야에 불과합니다. 여기가 우리의 원적지가 아닙니다. 영원한 가나안, 천국까지 입성해야 합니다.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본향을 대망하며 나그네의 행보를 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생애나 그의 위상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게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입니다. 2절을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독자인 줄 몰라서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겁니다. 이삭을 잡아 각을 떠서 하나님께 불살라 바치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의 대가 끊깁니다. 첩의 아들 이스마엘은 어쨌든 쫓아냈습니다.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잡아 바치면 대가 끊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자손을 번성케 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는 약속, 또한 이삭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이삭은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이삭 등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업혀 있습니다.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이삭을 죽여 바치라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뭐가 그리 유쾌한 일이라고 새벽 같이 길을 떠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사흘 만에 번제드릴 모리아 땅에 도착했다는 얘기입니다. 사흘 길을 걸어오면서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처음에는 얼떨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집을 나섰다고 해도, 사흘이면 충분히 정신을 차릴 시간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었습니다. 요나처럼 변심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날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은 지금 쇼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이삭의 목을 따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급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순간을 기대하고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물론 아브라함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압도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눌려 본의 아니게 아들을 잡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꾸만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애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쯤 항의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브라함을 볼 때 저는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오해였습니다. 저의 눈높이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단한 결과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 구절이 없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이 다 날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으로 이삭을 드린 겁니다. 어떤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살려주실 줄 믿고 실제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토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태산같이 믿었습니다. ‘내가 아들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안 살려 주시면 어떻게 하나?’ 라고 생각했다면, 이삭을 죽일 수 없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오니까 다급해진 것은 하나님입니다. 당장 칼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산 같은 믿음에 하나님마저도 백기를 드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명실상부한 믿음의 조상으로 공인하십니다. 이제야 네 믿음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크면 큰 만큼 그 시험을 통과하면 큰 영광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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