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견습생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1956년 포항에서 태어나 37세를 일기로 요절한 해직교사 정영상 시인의 유작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바닥에 뒹구는
일회용 면도기들이
언젠가 두고 보자며
나를 벼르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 더미가 된 일회용들이
으드득 이를 갈며 큰 재앙이 되어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때를 미는 동안에도
계속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는
보람도 없이 억울하게 버려지는 물들이
“인간들아,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며 씨불씨불 흘러가는 물들이
바닥에 질펀한 죄를 씻어 내리며 언젠가, 언젠가 두고 보자!
그렇게 벼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 생태문제에 남다른 시적 관심을 보였는데 이 작품도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괴테가 그린 마술사의 견습생과도 같습니다. 그는 무엇이든 생기게 하는 재주만 배웠지 멈추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없는 동안 마술을 부려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멎게 하지는 못했기에 결국 그 물에 떠밀려 죽고 맙니다. 현대인들도 막장까지 간 소비문명의 발걸음을 스스로 멈추는 재간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세계가 인간의 탐욕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란 탐욕이라는 궤도를 타고 무한질주하는 열차와도 같습니다. <보다 빨리! 보다 편리하게! 보다 많이!> 이게 이 시대 문명인들의 광기어린 지상목표 아닙니까? 그래서 기업들은 늘 과잉생산에 바쁘고 사람들은 그 재고 처리를 위해 오늘도 소비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거기에 불응할 자유도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온갖 매체를 다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탐욕을 부추기는 마당에 자유는 무슨 놈의 자유입니까? 아무튼 지구는 이제 인간이 배출한 폐기물에 뒤덮여 소멸 생성의 순환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공장들의 과잉 생산으로 망해간다는데도 그 기계를 정지시킬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2천 년 전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롬 8:22). 충격적입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보다 슬픔과 고통의 탄식을 들은 것입니다. 자연이 그 본래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허무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며 지금도 자유와 해방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 사상으로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공동의 운명체로 본 것입니다. 역사란 단순한 정신사 혹은 실존사가 아니라 우주사요 자연사요 보편사라는 것입니다.
동양의 노자(老子)도 그렇습니다. 그를 추상적인 사색가로만 보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는 그 시대 조류에 철저하게 저항한 혁명아였습니다.
불상현(不尙賢) 소위 지도자니 엘리트니 하는 권력자 따위를 떠받들지 마라.
사민불쟁(使民不爭) 그러면 권력투쟁이나 권모술수 같은 것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데 정력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
불귀난득지화(不貴難得之貨) 사람들이 제일로 치는 돈을 귀하게 여기지마라.
사민불위도(使民不爲盜) 그러면 훔치고 등치고 사기협잡하고 뇌물을 주고받으며 부정부패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불견가욕(不見可欲) 상품 선전에 눈을 팔지 마라.
사민심불란(使民心不亂) 그러면 미혹을 받아 충동구매 과잉구매할 일이 없을 것이다.
.
.
.
위무위즉무불치(爲無爲則無不治) 제일 좋은 정부란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지 않고 가장 적게 다스리는 것이다. - 도덕경 제3장.
제 멋대로 갖다 붙인 해석입니다만 노자 역시도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경계하며 가장 자연에 가까운, 가장 자연친화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려한 사상가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도 자연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사람은 <마술사의 견습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롬 8:19)임을 결코 잊지 말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