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2w: 고린도후서 강해 17(고후 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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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17
본문: 고후 9:9-15
[9]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지난주에는 어떤 헌금이 참 연보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헌금이 참 연보입니까? 5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준비한 헌금, 즐겨내는 헌금이 참 연보입니다. 참 연보에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수확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참 연보는 축복의 씨앗이기에 적게 심으면 적게,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또한 심되 지속적으로 심어야 합니다. 연보는 평생 심어야 할 소중한 축복의 씨앗입니다. 한 번 심으면 한 번, 두 번 심으면 두 번, 그러나 평생 심으면 평생 거둡니다. 그러므로 배고프다고 해서 씨앗을 먹어치우는 농부가 없듯이 씨앗인 헌금은 절대 줄이거나 하던 헌금을 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힘들수록 씨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10절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따로 주셨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다 넉넉하고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심을 씨앗 따로, 먹을 양식 따로 배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로 하여금 심을 씨앗이 없거나 먹을 양식이 없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단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상하시고 세심하시기에 우리에게 씨와 양식을 각각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코 뿌릴 씨앗이 없거나 먹을 양식이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은 뿌릴 씨도 먹을 양식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우리에겐 뿌릴 씨도 먹을 양식도 없습니까?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을 뿌리지 않고 먹어 치웠기 때문이고, 먹을 양식에 만족하지 않고 쌓아 놓고 먹으려 하기에 그 양식이 썩어서 그렇습니다. 양식에 벌레가 생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거둘 때 며칠 분을 거두면 냄새가 나고 벌레가 났다고 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뿌릴 씨 따로, 먹을 양식 따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겁니다. 씨앗을 홀라당 먹어치웠으니 거둘 게 없습니다. 거둘 게 없으니 뿌릴 씨앗도 없습니다. 악순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법칙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씨로 주신 것은 뿌리고, 먹으라고 주신 것은 양식을 삼아야 하는데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뿌릴 씨앗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입이 있는 사람치고 십일조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십일조를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십일조는 첫 수입이자 첫 열매입니다. 천원을 벌면 십일조 백원부터 떼야 합니다. 하나님이 뿌릴 씨와 먹을 양식을 따로 주셨습니다. 한 주간이 주어지면 첫 날은 떼서 성일(聖日)로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시간이 없어서 주일성수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법칙을 무시하기에 바칠 연보가 없고, 지킬 성일이 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따로 주신 씨를 범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씨앗이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축복의 씨앗을 먹어치운 사람이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바라신다면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십시오. 씨는 정직합니다. 농부가 성의를 다해 보살피면 열매를 냅니다. 소홀히 다루면 열매도 엉성합니다. 모두 넘치는 축복의 열매로 여러분의 삶이 보다 풍족해 지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연보라 하지 않고 헌금이라고 하는데, 헌금은 하나님께 바친 돈이라는 의미고, 연보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친 돈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연보라는 말이 더 성서적입니다. 원래 헌금은 가난한 자를 돕는 목적으로 초대교회에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헌금의 주된 목적은 연보입니다. 물론 사회가 많이 변하고 문화가 변하고, 교회 조직과 운영 체계가 변했습니다. 요즘에는 교회를 유지하는 데 돈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헌금에 담겨있는 연보로서의 본래 취지나 목적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은 연보라는 말을 헌금으로 바꾸어 놓고서 안심하고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다 사용합니다.
왜 우리가 연보의 본래 취지나 목적을 잊으면 안 됩니까? 9절입니다: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바울이 시편 112편 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헌금을 해서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의로운 행위야 말로 그 아름다움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행위가 영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그 어떤 일을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연보를 해서 그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우면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의 의로움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보상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를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연보의 본래 취지나 의미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헌금의 진정한 뜻은 연보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연보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11절 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어지는 12절 하반절 입니다: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절 하반절 입니다: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절 하반절 입니다: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어떤 은혜입니까? 연보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15절도 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연보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보가 너무도 부담스럽고, 현실적으로 짐이 되는데, 바울은 성도들이 연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합니다. ‘지극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도 연보에 대해 이렇게 감사하며, 연보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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