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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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 날마다 조금씩 소중한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에서 지워가는 병,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과도 점점 멀어지는 고약한 병.
치매는 누구도 발병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병이어서 무섭고 또 희망이 없습니다. 아직 치료제조차 없고, 다만 비약물이나 혹은 약물 처방으로 다소 그 진행을 늦추고 조금이라도 그 증상을 완화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인 병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치매를 <예쁜 치매>와 <미운 치매>, <착한 치매>와 <나쁜 치매>로 구분합니다.
젊은 시절 전전두엽을 충분히 사용하고 좋은 경험을 많이 축적한 사람은 순하고 <예쁜 치매>로 가고, 나쁜 기억들이 많고 늘 불안정한 환경에서 지낸 사람들은 화를 잘 내고 툭하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미운 치매>로 간다고들 합니다. 즉 같은 치매라도 환자 본인도 덜 망가지고, 가족들에게도 피해나 부담을 덜 주면 그건 <예쁜 치매>, 그 반대의 경우면 <미운 치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나이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어 하는 불치병인데 <예쁘거나 밉고> <착하거나 나쁘다>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권 권사님의 경우 아직은 전자이신 것 같습니다. 좋은 경험이나 좋은 환경과는 거리가 먼 고되고도 험난한 길을 살아오셨지만 매사에 긍정적이신 성격과 믿음 덕분인지 아직은 예쁘고 착한 수준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권사님은 지금도 매일 새벽 3:30 칼처럼 일어나셔서 무릎을 꿇고(관절에 무리가 가니 그냥 앉아서 기도하시라고 권해도 소용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자식들 손주들을 위해 꼭 1시간 반 동안 기도하십니다. 평소 누구보다도 강인하셨고, 홀로 지내시는 데도 익숙하셔서 외로움 따위는 모르고 사시는 분처럼 보이셨을 뿐 아니라 늘 <성경 읽고 기도하는데 뭐가 심심해?> 하셨던 분이셨지만 이제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시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래도 저는 <늙으면 다 그렇지!>라는 말로 퉁치며 권 권사님의 치매기를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단계까지 온 것 같습니다.
뭐든 꼭꼭 갈무리를 하십니다.
마치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다는 듯 깊이 숨기시고 그걸 다시 찾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십니다. 어느 샌가 동네 산책도 귀찮아하시며 제 강요에 못 이겨 겨우 30-40분 집 주위를 서성대다 오시는 게 거의 유일한 외부활동이십니다.
좀 전에 물었던 것을 처음인 듯 돌아서서 다시 묻는 일은 다반사고, 창문을 열려고도 않지만 열린 문은 강박적으로 다시 닫곤 하십니다. 컴컴한 방안에서 혼자 TV를 보시는 게 유일한 낙이 되셨고, TV 출연자들이 하는 말을 자기에게 하는 말로 착각하시며 TV와 대화를 많이 하시기도 합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더 파더>(플로리앙 젤러 감독)는 너무도 충격적인 치매 영화입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로 치매 환자의 혼란과 흔들리는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간 감독의 연출이 가히 독보적입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애처롭고 이를 대하는 딸(올리비아 콜맨)은 안타깝습니다.
함께 살 수도, 안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 영화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가족들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너무도 사랑하지만 미워하게 되는, 미워하고 싶지만 또 그럴 수도 없는 아버지를 향한 가족들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또 몹시 차갑고 냉정합니다.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하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다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결국 요양원으로 향하는 아버지, 영화의 엔딩은 요양원 밖의 따사로운 햇살과 푸른 나무를 비춰주며 끝을 맺습니다.
오늘도 현관 열쇠를 잃어버리고 벌써 몇 시간째 찾고 계시는 권 권사님을 보면서 시간도 공간도 가족도 사람도 모두 헝클어져 뒤죽박죽이 된 현실 앞에서 괴로워하던 영화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생각나 괴로웠고, 또 이 모든 진행 과정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마땅히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게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는 주말입니다.
여든 여섯, 저로서는 여전히 안타까운 연세이신 권 권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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