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배교와 순교

성경에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고통하며 절망하는 수난자들의 절규가 많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시 13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시며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시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시 22편).

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절규로까지 이어집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1986년 노벨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하나님에 대한 심판>(The Trial of God)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억울한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조치도 없이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유대 랍비 세 사람의 심문과 재판입니다. 

제가 오늘 소개하려는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부재>를 다룬 소설입니다. 

 저는 이미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주중 또 한 번 봤는데 여전히 아름답고 처절해 끝까지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듭 생각해보게 한 감동적인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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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교회가 이 지하 예배당에 입당한 다음해인 2005년 여름휴가 때 일본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함께 유학한 제일교포 2세 목사님의 초청으로 간 것인데 그때 그분의 안내로 나가사키의 한 작은 어촌인 <소토메>까지 갔었습니다. 거기에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단골로 올랐던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때 본 문학관 앞마당 돌비석에 작가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다지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

저는 그날 그 쪽빛바다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비문에 적힌 작가의 그 한 마디가 소설 <침묵>을 너무도 절묘하게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아프고 처절한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바다는 오늘도 저토록 파랗고, 하나님은 여전히 감감하시다는 겁니다.

 

소설 <침묵>은 첫 페이지부터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빠른 템포로 전개되며 독자들로 하여금 숨 가쁘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17세기 에도 시대 초기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을 금지했고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는데 그 중에서도 <소토메>는 가장 끔찍한 고난의 장소이자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죽어간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나가사키 항이 바로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였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는 밀입국하여 소토섬에 잠입하지만 결국은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성화를 밟고 침을 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차마 그 성상을 밟지 못하고 침을 뱉지 못해 고문당하다 죽어갑니다. 어떤 한 애꾸눈 사내는 배교를 거부하다 옥사 마당에서 단칼에 목이 잘려 피가 땅바닥에 물줄기처럼 꾸역꾸역 흘러나와 엉기는데 한낮의 따가운 햇살과 건조한 매미소리며 소토메 앞바다의 물빛은 여전히 쪽빛 그대로입니다. 그 잔혹한 현장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저들이 다 하나님 신앙 때문에 저렇듯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마냥 <침묵>하고 계시냐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드리고 신부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문과 박해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으나 자신이 배교할 때까지 계속되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고문 앞에서는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후미에>라는 배교의식을 위해 로드리고 신부가 주님의 성상 앞에 섰습니다. 

평생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게 여겨온 주님의 성체를 밟아야 하는 고통이 발을 통해 전율처럼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밟아라. 밟아도 좋다. 네 발의 고통을 내가 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다. 괜찮다. 어서 밟아라.>

 

그 배교의 순간에 로드리고 신부가 깨달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처절한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고통하고 배교마저도 도우시며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더 이상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고문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문당하시고, 순교당하는 자들과 함께 묵묵히 형틀에 달리시는 생생한 고난의 하나님, 순교의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일본에서 어떻게 이토록 깊은 신앙적 성찰이 문학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도 바로 이런 엔도의 <침묵>과 맞닿아 있습니다.

 

지금도 연일 지옥 같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절규하며 기도하고 있는 저 우크라이나 성도들도 침묵 속에서 자신들과 함께 포격 당하시고 친히 피난길에도 동행하시며 고난을 겪고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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