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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배교와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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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span>성경에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고통하며 절망하는 수난자들의 절규가 많습니다.</span></p>

<!-- paragraph:p0002 -->
<p class="p1"><span>&lt;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gt;(시 13편).<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03 -->
<p class="p1"><span>&lt;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시며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시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gt;(시 22편).</span></p>

<!-- paragraph:p0004 -->
<p class="p1"><span>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절규로까지 이어집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05 -->
<p class="p1"><span>&lt;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gt;</span></p>

<!-- paragraph:p0006 -->
<p class="p2"> </p>

<!-- paragraph:p0007 -->
<p class="p1"><span>1986년 노벨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lt;하나님에 대한 심판&gt;(The Trial of God)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억울한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조치도 없이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유대 랍비 세 사람의 심문과 재판입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08 -->
<p class="p1"><span>제가 오늘 소개하려는 일본인 작가 &lt;엔도 슈사쿠&gt;의 &lt;침묵&gt;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lt;부재&gt;를 다룬 소설입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1"><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저는 이미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주중 또 한 번 봤는데 여전히 아름답고 처절해 끝까지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듭 생각해보게 한 감동적인 소설이었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10 -->
<p class="p1"> </p>

<!-- paragraph:p0011 -->
<p class="p1"> </p>

<!-- paragraph:p0012 -->
<p class="p1"><a href="http://thegreen.or.kr/./files/attach/images/64/502/060/c953c6ad04889b2a488fa48f2aeb96fe.jpg" class="image-placeholder">x9788936506391.jpg</a></p>

<!-- paragraph:p0013 -->
<p> </p>

<!-- paragraph:p0014 -->
<p class="p1"> </p>

<!-- paragraph:p0015 -->
<p class="p1"> </p>

<!-- paragraph:p0016 -->
<p class="p2"> </p>

<!-- paragraph:p0017 -->
<p class="p1"><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우리 교회가 이 지하 예배당에 입당한 다음해인 2005년 여름휴가 때 일본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함께 유학한 제일교포 2세 목사님의 초청으로 간 것인데 그때 그분의 안내로 나가사키의 한 작은 어촌인 &lt;소토메&gt;까지 갔었습니다. 거기에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단골로 올랐던 &lt;엔도 슈사쿠&gt;의 문학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때 본 문학관 앞마당 돌비석에 작가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span></p>

<!-- paragraph:p0018 -->
<p class="p1"><span>&lt;인간은 이다지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gt;</span></p>

<!-- paragraph:p0019 -->
<p class="p1"><span>저는 그날 그 쪽빛바다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0 -->
<p class="p1"><span>비문에 적힌 작가의 그 한 마디가 소설 &lt;침묵&gt;을 너무도 절묘하게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아프고 처절한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바다는 오늘도 저토록 파랗고, 하나님은 여전히 감감하시다는 겁니다.</span></p>

<!-- paragraph:p0021 -->
<p class="p2"> </p>

<!-- paragraph:p0022 -->
<p class="p1"><span>소설 &lt;침묵&gt;은 첫 페이지부터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빠른 템포로 전개되며 독자들로 하여금 숨 가쁘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3 -->
<p class="p1"><span>17세기 에도 시대 초기 권력을 잡은 &lt;도쿠가와 이에야스&gt;는 가톨릭을 금지했고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는데 그 중에서도 &lt;소토메&gt;는 가장 끔찍한 고난의 장소이자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죽어간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나가사키 항이 바로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였기 때문입니다.</span></p>

<!-- paragraph:p0024 -->
<p class="p2"><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5 -->
<p class="p1"><span>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는 밀입국하여 소토섬에 잠입하지만 결국은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성화를 밟고 침을 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차마 그 성상을 밟지 못하고 침을 뱉지 못해 고문당하다 죽어갑니다. 어떤 한 애꾸눈 사내는 배교를 거부하다 옥사 마당에서 단칼에 목이 잘려 피가 땅바닥에 물줄기처럼 꾸역꾸역 흘러나와 엉기는데 한낮의 따가운 햇살과 건조한 매미소리며 소토메 앞바다의 물빛은 여전히 쪽빛 그대로입니다. 그 잔혹한 현장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저들이 다 하나님 신앙 때문에 저렇듯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마냥 &lt;침묵&gt;하고 계시냐는 겁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6 -->
<p class="p1"> </p>

<!-- paragraph:p0027 -->
<p class="p1"><span>그리고 마침내 로드리고 신부 차례가 왔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문과 박해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으나 자신이 배교할 때까지 계속되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고문 앞에서는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9 -->
<p class="p1"><span>&lt;후미에&gt;라는 배교의식을 위해 로드리고 신부가 주님의 성상 앞에 섰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평생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게 여겨온 주님의 성체를 밟아야 하는 고통이 발을 통해 전율처럼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31 -->
<p class="p1"><span>&lt;밟아라. 밟아도 좋다. 네 발의 고통을 내가 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다. 괜찮다. 어서 밟아라.&gt;</span></p>

<!-- paragraph:p0032 -->
<p class="p1"> </p>

<!-- paragraph:p0033 -->
<p class="p1"><span>그 배교의 순간에 로드리고 신부가 깨달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처절한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고통하고 배교마저도 도우시며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더 이상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고문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문당하시고, 순교당하는 자들과 함께 묵묵히 형틀에 달리시는 생생한 고난의 하나님, 순교의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34 -->
<p class="p2"> </p>

<!-- paragraph:p0035 -->
<p class="p1"><span>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일본에서 어떻게 이토록 깊은 신앙적 성찰이 문학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lt;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gt;도 바로 이런 엔도의 &lt;침묵&gt;과 맞닿아 있습니다.</span></p>

<!-- paragraph:p0036 -->
<p class="p2"><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37 -->
<p class="p1"><span>지금도 연일 지옥 같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절규하며 기도하고 있는 저 우크라이나 성도들도 침묵 속에서 자신들과 함께 포격 당하시고 친히 피난길에도 동행하시며 고난을 겪고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