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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9w 신명기 강해 14(신 5:1-6)

20140129w

신 5:1-6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지난주의 주제는 도피성이었는데, 오늘은 십계명이 주제입니다. 십계명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면, 모세가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1)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 10가지가 삶의 규범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은 신명기 5장과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유랑하는데 3달쯤 지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과 그것 외에도 많은 규례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모세가 받지 않은 규례들은 이후에 율법학자들이 십계명을 재조명하여 구체적인 시행세칙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체계가 굉장히 방대해진 것입니다. 요즘 민주화된 국가들의 헌법도 그 저변에는 십계명이 깔려있습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에 담겨 보관되었습니다. 유랑 생활할 때는 성막의 지성소에 그 언약궤를 두었고, 언약궤는 이후에 다윗의 왕궁에도 보관이 되었고, 솔로몬 성전을 만들던 시점부터는 그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습니다. 거의 500년간 보관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에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주전 584년에 바벨론에 망할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태울 때 사라졌습니다. 성전에 불 지르기 전에 성전에 있던 황금으로 된 기명들을 다 약탈해 갔는데, 그 약탈 목록에 법궤가 빠졌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사장들이 약탈 직전에 성전 가까운 자연동굴에 숨겼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성전 약탈을 할 때 정말 알뜰히 다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록에서 빠진 것을 보면 그 직전에 제사장이 빼돌린 게 신빙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발굴작업에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나도록 법궤의 행방은 오리무중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간 하고 복귀를 해서 훼파된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그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성전의 지성소에도 언약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성전인데, 거기 지성소에도 언약궤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증발한 언약궤는 그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찾으면 그 안에서 십계명의 원판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첫 번째 돌판에는 1-4계명이, 두 번째 돌판에는 5-10계명이 기록되었습니다. 첫 번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두 번째 돌판에는 사람에 관한 돌판입니다. 이렇게 십계명이 두 개로 구분되기에 하나님도 나눠서 기록해 주신 겁니다. 주님도 계명을 둘로 구분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문제는 구약시대가 아닌 오늘 우리에게도 율법이 의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어떻게 새앆하십니까? 율법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게 성서적이며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시대가 아닌 복음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율법이 유효하며 구속력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고 반드시 짚고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왜냐면 아직도 많은 신자가 이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둘 중 하나입니다. 먼저는 율법주의입니다. 비록 지금이 복음시대이긴 하나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 이상 지켜야 하고,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있어온 유대주의 사상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복음도 믿어야 하나 율법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이게 맞습니까? 틀립니다. 복음뿐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틀린 겁니다. 이것은 복음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누구도 율법을 100% 다 지킬 수 없습니다. 누구든 완벽히 율법을 지킨다면 구원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시대를 주님이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즉 복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은 삶의 윤리적 규범이기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우리 삶이 건강해지고,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밝아집니다. 우리 영혼이 거룩해집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최대 과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에 있습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규범입니다. 복음시대를 사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이 아니라 거룩한 삶의 지침이 율법입니다.


다음으로는 극단한 복음주의입니다. 율법주의의 반대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이 시효를 다했다고 봅니다. 율법은 구약시대 때만 유효했고, 복음시대에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이 옳습니까? 의외로 이런 분이 적지 않습니다. 아주 급진적인 복음주의 말입니다. 우선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신 주님이 율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셨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 가운데 주님을 율법 파괴자로 본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예 주님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님의 오해한 사람이 있었기에 주님이 이 점을 분명히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율법을 100% 지킬 수 없었습니다. 실은 율법의 한계라기보다는 범죄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을 갖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율법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을 위해 내가 복음을 갖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가져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보다 완전해졌습니다. 율법은 절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완전해졌습니다. 이 시대에도 율법이 유효하다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율법을 어떻게 대하고, 지키고, 해석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야 옳습니까?


율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율법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율법을 이해하고 적용하되 복음적으로 해야 합니다. 율법을 복음으로 조명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복음주의적으로 율법을 수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처음 율법을 제정하신 정신을 추구하자는 겁니다. 율법조항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율법조항을 어떻게 해석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복음적인 율법해석이며 수용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율법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너희에게 명하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은 실제 죽여야 살인죄가 됩니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실제 사건이 발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말하는 살인죄는 실제 사람을 죽이기 전이라도 형제를 미워하면 벌써 살인을 범한 겁니다. 율법은 기계적이고 문자적입니다. 율법은 결과만 묻습니다. 복음은 그 동기를 묻습니다. 결국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살인으로 가는 바로 그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실제 형제를 죽이지 않아도 형제를 미워하면 복음적으로는 이미 살인죄를 범한 겁니다. 제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인데, 율법적인 해석과 복음적인 해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보입니다.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데, 율법은 실제 간음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잔뜩 음욕을 품고 있으면서도 실제 간음을 하지 않았기에 무죄하다는 것은 율법주의이고, 복음은 이미 그런 동기부터 간음으로 보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계명을 제정하실 때는 이런 근본적인 정신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기계적으로 율법을 적용하며 사람을 단죄한 것입니다. 이것은 법 취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본래의 율법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게 복음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큽니다. 그 형식, 내용, 문자, 정신의 차이가 큽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정확히 내 소득의 1/10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1/10이 아니라 10/10이 주님의 것인데, 1/10만 바치며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더 철저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성일 성수는 한 주간의 하루만 칼처럼 떼어 바치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입장에서는 한주간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루를 떼어 바치며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을 붙잡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시대이기에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는 입장은 제멋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궤변입니다. 차라리 율법이 쉽고 복음이 더 무섭습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복음적으로 율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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