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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0w: 히브리서 강해 15(히 10:1-29)

2008년 12월 10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15
본문: 히 10:1-29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장도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시작됩니다. 1절을 보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장차 올 좋은 일, 참 형상은 당연히 주님이 당신의 몸을 드리시고 우리를 단 번에 대속하신 구속 사건을 뜻합니다. 율법 시대의 제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계 정도가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심지어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구약의 제사와 율법의 한계를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장차 올 좋은 일, 참 형상의 그림자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구약 때는 제물이 짐승의 피였습니다. 그 짐승의 피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데 근본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 번 제사를 드려야 했고, 매 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원치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것들로 인간의 죄를 결코 대속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장차 올 좋은 일, 참 형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단 번에 자기 몸을 드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바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만 인간의 죄가 근본적으로 도말될 수 있다는 겁니다. 10절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해졌다는 겁니다. 12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소의 휘장을 넘어 지성소까지 나아가서 직접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많은 피조물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늘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고 언제나 원할 때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존재로 에덴에서 살았습니다. 실제 에덴동산에서 살 때 아담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뵈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장애 없이 교통했습니다만, 범죄 이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죄라는 장벽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제사장도 지성소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죄악의 장벽이었습니다. 아무리 구약 시대에 염소의 피와 황소의 피를 많이 바쳤어도 이 장벽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바치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 곧 죄악의 담이 무너진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지성소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 우리가 제사장이 되어 지성소까지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제사장 이라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만, 이제는 중보자가 필요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만인 제사장이란 말이 나온 겁니다. 이제는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시대입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러므로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렇게 말씀하며 오늘 본문은 이제 우리에게 세 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23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의 도리는 주님이 당신의 피를 제물로 우리를 단 번에 깨끗케 하시고 온전히 대속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굳게 잡자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굳게 붙잡고 찢어진 휘장 사이의 길을 통해 지성소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뵙자는 겁니다.
둘째, 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원래 교회는 격려 공동체입니다. 교부들은 교회를 코무니오 상크토룸(Communio Sanctorum)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교제 공동체, 격려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서로 격려하면서 휘장 가운데 난 길로 들어가자는 겁니다. 서로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격려가 아니라, 쌍방향의 격려라는 말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성도들이 목사를, 성도들 사이에 서로서로 격려하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열심히 모이는 일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왜 여기서 모이라고 할까요? 그래야만 믿음이 식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마치 장작불과 같습니다. 잘 타던 불도 흩어 놓으면 식습니다. 그러나 모아 놓으면 잘 탑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생리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당부한 겁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안 모인다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안 모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의 예언입니다. 유럽 교회, 미국 교회를 보십시오. 점점 모이지 않습니다. 이제 안 모이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안 모이면서도 이제 전혀 부담을 느끼지도 않고, 만성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누구도 잘못되었다는 자각을 갖지 못합니다. 유럽 교회는 안 모이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질수록 안 모이는 현상이 습관화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해마다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한국 교회도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주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유럽 교회가 미국 교회가 모이지 않아도 너희는 모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사실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당부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짐짓죄입니다. 다 알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누구나 깨끗케 된 사람은 이 복음의 핵심을 굳게 잡고, 서로 격려하고 돌아보며, 모이기를 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 알면서 이렇게 행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짐짓죄입니다. 짐짓죄는 히브리서 10장 27절에 의하면 다시 속하는 방법이 없고, 맹렬한 불만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짐짓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는 일, 서로 격려하는 일, 모이기를 힘쓰는 일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히브리서 10장 26절 이하의 짐짓죄의 문제를 해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