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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10월 26일 푸른교회 주일낮예배(종교개혁주일)<br>본문: 막 1:14-15<br>제목: 바실레이아 투 데우</p>
<!-- paragraph:p0002 -->
<p>[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p>
<!-- paragraph:p0003 -->
<p><br>여러분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지니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이해하는 예수님의 캐릭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혁명가나 개혁가로 알고 계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이 투사나 전사의 모습으로 연상되지는 않습니다. 실제 주님은 유대교를 대적하시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회당, 할례, 안식일, 절기 같은 전통과 제도를 자명하게 인정하셨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속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나는 그런 것을 위해 오지 않았다며 잘라 거절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이 로마제국이 존재를 과연 알고 계셨을까 하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어디서도 로마 식민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내겠다는 결의가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 때문에 종교개혁, 사회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의 배타주의가 타파되었습니다. 유대교의 배타주의를 기독교가 극복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주님 이전만 해도 물건이었습니다만, 그런데 여인들과 아이들을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의인과 죄인 사이의 계급적 담을 허무셨습니다. </p>
<!-- paragraph:p0004 -->
<p>여러분, 주님이 3년 동안 선포하신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것은 주님의 공생애의 첫 일성인데, 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 간 이 땅에 계실 때도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공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바실레이아 투 데우’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입니다. </p>
<!-- paragraph:p0005 -->
<p>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공간 개념, 영토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 대륙 같은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이 세상과 구별되는 초자연적 세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 개념이 아니고, 주권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지배, 정치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분의 사역이 정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p>
<!-- paragraph:p0006 -->
<p>본문 14절을 다시 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힌 후에 주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은 왜 헤롯에게 잡혔습니까? 헤롯의 비리를 고발했기 때문에 정치범으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한이 잡힌 직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겁니다. 어디서 시작하셨습니까? 바로 요한이 잡힌 그 사건현장입니다. 갈릴리입니다. 아직도 요한이 잡힌 직후 이기에 공안정국인데 그 사건현장으로 직행하신 겁니다. 무엇이라고 외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주권을 외치셨습니다. 헤롯의 주권이 지배하고 횡포하는 그 사건현장으로 곧장 오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외치신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실 정치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헤롯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직도 헤롯의 권력이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헤롯의 주권에 대한 도발입니다.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의 타이밍이나 그 현장의 분위기나 선포의 내용은 대단히 정치적입니다. 이것은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겁니다. </p>
<!-- paragraph:p0007 -->
<p>그런데 주님의 그다음 행보가 이상합니다. 요한복음 2장 13-19절입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니까 주님의 첫 사역지인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 선포가 사회개혁을 의미했다면, 예루살렘에서의 두 번째 사역은 종교개혁을 뜻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거점입니다. 그 유대교이 심장까지 돌진해서 성전을 숙정하시고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은 당시 타락한 종교에 대한 가공할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은 사회개혁과 종교개혁에 일찍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사회도 교회도 개혁하신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개혁하셨습니다.</p>
<!-- paragraph:p0008 -->
<p>지금부터 491년 전에 있었던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도 이런 주님의 개혁정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 곧 ‘개혁 신교회’는 처음에는 두 개 교단으로 출범했습니다. 루터주의자들의 루터교, 칼빈주의자들의 장로교입니다. 그 이후 여기서 많은 교단이 파생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개 교단 가운데서 개혁교회로 명명하는 교회는 장로교 밖에 없습니다. 루터교는 개혁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장로교만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합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장로교가 들어와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고 합니다만, 장로교의 본산인 유럽에 가면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왜 루터교나 장로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출범한 교단인데 왜 그럴까요? </p>
<!-- paragraph:p0009 -->
<p>루터주의에는 두 왕국설(Zwei Reche Lehr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루터교는 정치와 종교를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왜냐면 중세의 천년 암흑기를 정치와 종교가 함께 붙어서 놀아다나 보니 이것을 경계하여 두 왕국설을 주된 교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종교도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정교분리 원칙도 영미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유명한 현대신학자 가운데 칼 바르트는 히틀러의 만행 앞에서 독일교회가 그토록 무력했던 이유는 루터의 두 왕국설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독일 루터교회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적용했기에 히틀러가 만행을 제재 없이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독일 루터교회에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p>
<!-- paragraph:p0010 -->
<p>그런데 칼빈주의는 좀 다릅니다. 개혁교회라 명명하는 장로교는 그리스도의 통치설(Koenigsherrschaft Christi Lehre)을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기에 삶의 모든 장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주권이 삶에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란 그리스도의 주권이 간섭하지 못하는 우리 삶에 그 주권이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정(神政)을 했습니다. 교회법으로 도시를 다스린 겁니다.</p>
<!-- paragraph:p0011 -->
<p>그런데 우리 푸른교회가 이 개혁교회의 전통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장로교라 부르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개혁가의 개혁정신을 계승하는 개혁교회의 성도로서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개혁되어야 합니다. 살길은 오직 개혁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너희 자신부터 개혁하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개혁이란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통치로 거듭나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우리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종교개혁 혹은 신앙개혁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이 시대에 필요한 개혁의 기수가 되시길 바랍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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