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9m: 사울과 유다(히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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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9일 주일낮예배
본문: 히 6:4-6
제목: 사울과 유다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오늘 설교 제목이 ‘사울과 유다’입니다. 이 둘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고,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낸 퀴즈의 정답은 아닙니다. 사울과 유다는 자살자들입니다. 자살한 신구약의 인물들입니다. 사울은 영예로운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지만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세 아들을 잃고, 자기도 부상당했는데 결국 자결합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인류 역사상 열둘뿐입니다. 얼마나 영예롭습니까? 그런데 스승을 은 30에 팔고 결국은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사무엘상 31장 3절 이하입니다: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여기서 병기 든 자는 왕의 경호원을 말합니다. 사울은 스스로 자해했고, 경호원까지도 자결했습니다.
다음은 신약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이하입니다: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가룟 유다가 자살한 대목입니다. 목매어 자살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구약을 오가면서 확인했는데,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서, 또 한 사람은 열두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시작은 거창했으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사람에 대해 구원론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까? 결론은 둘 중 하나인 듯합니다. 우선 원래는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상실한 케이스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택함받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알곡 사이에 자라난 가라지처럼 본색을 드러내고 제 갈 길로 간 케이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이 정말 택함 받은 사람이었다면 엎치락 뒤치락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어도 자살로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자살하지 않고, 살인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살해당할 수는 있어도 남을 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안 믿고, 죽으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안 믿으니까 자살하는 겁니다. 결국 자살은 천국, 지옥, 심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괴로워서 자살하는데 지옥가면 더 괴로운데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이 자기 의지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살한 근본적으로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물론 요즘은 환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을 많이 합니다. 우울증이 극심해지면 결국 자살로 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환자들의 자살은 자기의지의 결단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병이 자살로 내몰기에 자기와는 상관없이 자살합니다. 이런 경우는 예외적입니다. 아마 그들이 자살해 하나님 앞에 가도 하나님이 정상참작을 하실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병이 그들을 죽인 타살입니다. 병이 내 의지보다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살의 케이스는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이 사람을 죽인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동안 사과나무처럼 보였다 해도 막판에 배가 열리면 그 나무는 배나무입니다. 그동안 아무리 배나무처럼 보였어도 가을에 사과가 열리면 사과나무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살이라는 열매를 맺으면 결국 그 나무는 사과나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든 자살로 생의 쓴 열매를 맺었다면 그 열매가 그 사람의 정체, 소속, 신분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가히 틀림이 없습니다. 열매가 그 나무를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무슨 뜻일까요?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까? 택함 받은 사람이 구원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구원이 해소된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반문이 필요합니다: “꼭 구원받은 사람만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할 수 있는가?”,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체험을 할 수 없는가?”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비유가 나옵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주인은 분명 알곡만 뿌렸는데 가라지도 납니다. 가라지가 알곡과 함께 자라면서 알곡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함께 누렸습니다. 하늘의 비췸도, 성령의 능력도, 내세의 기쁨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인의 곡간까지는 못했습니다. 가라지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농부가 뿌리지 않았음에도 가라지가 났습니다. 알곡이 누린 모든 것들을 누렸으나 끝까지 가지는 못합니다. 알곡만 곡간으로, 가라지는 불로 갔습니다. 또 이런 비유도 나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립니다. 씨가 선택된 옥토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농부는 옥토에 떨어지라고 뿌리지만, 자갈밭에도, 가시밭에도, 맨땅에도 떨어졌습니다.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가시밭이나 돌짝밭에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떨어진 씨앗도 싹은 틔우나 열매는 못 맺습니다. 선택된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습니다. 또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그물 비유입니다.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끌어 올렸는데 그 그물 안에는 물고기만 있지 않고, 온갖 해초며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습니다. 분명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내렸지만 그 그물 안에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는 물고기만 골라내고 다른 것은 다 버렸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만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게 아닙니다. 가라지도 이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게 현실입니다. 이를테면 구약의 사울 왕과 신약의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출발은 그럴 듯했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아쉽지만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들이 중간에 정체가 폭로되고 결국 도태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도 타락하고 실패해서 영영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아무리 하늘의 비췸을 얻었다 하더라도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본문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살할 수 없습니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은 병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기에 타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실제로는 그가 정말 택함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그가 우울증으로 자살에 이르도록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 타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수수방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보혜사 성령이 두고 보시지만은 않습니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귀한 백성이 스스로 자살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저는 그 사람이 우울증으로 자살했던, 제 정신으로 자살했든지 결과는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설령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미수에 그치게 하십니다. 제 아무리 성실하게 신앙생활했다고 하더라도 자살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겁니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성실했는지 아십니까? 돈을 아무에게나 맡깁니까? 신뢰가 가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작품이면 조잡합니다. 우리의 작품이면 우리는 얼마든지 구원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있습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결코 구원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녀의 신분은 영원합니다. 의절을 해도 자녀는 자녀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품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우리가 잘못했다고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자살자가 너무 많습니다. 2007년 현재 OECD 국가 가운데 자살 순위 제1위입니다. 자살이 유행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후예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쓰디 쓴 자살의 열매가 아니라, 아름답고 탐스러운 복된 열매를 맺는 가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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