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729m 기도의 모범(왕상 18:30-46)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러분, 마차를 탄 사람과 자기의 두 발로 뛰는 사람이 시합을 벌인다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마차 타고 달리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마차를 탄 아합 왕보다 맨 발로 뛴 엘리야가 더 빨랐습니다. 46절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22km를 마차를 탄 아합왕 앞에서 엘리야가 달렸습니다. 하프 마라톤 코스입니다.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엘리야는 왜 그 빗속을 달렸습니까? 너무 감격해서입니다. 3년 6개월간 이스라엘 땅에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는데, 기도했더니 지금 장대비가 쏟아지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감격스런 마음으로 마차보다 더 빨리 빗속을 달린 겁니다. 


사실은 비뿐만 아닙니다. 엘리야는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37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어지는 38절을 보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도 그 제단 주위 도랑의 물까지 다 태웠다는 겁니다. 엘리야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기도해서 불도 내리고 필요해서 비를 기도하니 3년 6개월간 한 방울도 오지 않았는데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했기에 불과 비의 응답을 받았을까요? 엘리야가 우리에게 제시한 기도의 모범에 의하면 기도에도 사전 정지작업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의 전제를 충족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했던 첫 번째 사전 정지작업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 것입니다. 30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여기서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다는 말은 그동안 소홀했던 제사, 황폐하게 방치했던 예배를 복원시켰다는 뜻입니다.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 예배에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땅에 비를 안 내리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불과 비를 달라 기도하기 전에 무너진 제단부터 수축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응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예배를 바쳐야 합니다. 최선의 것을 드려야 하는 겁니다. 엄격히 말하면 응답은 예배의 메아리입니다. 예배의 반대급부입니다. 예배를 황폐하게 방치한 채 기도해서는 응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먼저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다음은 죄악을 척결했습니다. 40절입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당시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했던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총 850명을 기손 강가에서 살육했습니다. 얼마나 극단합니까? 얼마나 과격합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려면 반드시 악을 척결해야 합니다. 우상을 소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 데 대한 엘리야의 판단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라는 장벽이 가로 놓이면 소통이 안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척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과격하고 잔인합니다. 850명을 쳐 죽였으니 기손 강물이 피로 물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악착같이 850명의 우상의 사제들을 살육했습니다. 기도에도 전제가 있습니다. 정지작업이 필요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기도하기 위해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생활의 롤 모델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기도의 전형이자 모범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놓칠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기도했기에 그 위대한 응답을 받았을까요? 구체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 막연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불을 내려주십시오. 비를 내려주십시오. 죽은 자를 살려주십시오. 기름을 주십시오. 가루를 주십시오. 엘리야의 기도는 항상 그렇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절대 애매하거나 모호하게, 어정쩡하게 하지 마십시오. 엘리야처럼 자기의 필요를 콕콕 집어 하십시오. 기도가 애매하면 응답도 애매합니다. 기도원에 가면 이 나라를 제게 주십시오. 이 세계를 제게 달라는 기도를 듣습니다. 그것은 허세요 허풍입니다. 진솔하고 소박하게 자기의 필요를 단순하게 엘리야처럼 비 달라, 불 달라고 해야 합니다. 병 낳게 해 달라, 문제 해결해 달라, 우리 아이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것은 유치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시 쓸 필요 없습니다. 정직하게 필요한 것을 진솔하게 기도하십시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나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기도하게 한 다음에 그 기도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이것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에게도 불을 구하게 한 다음에 불을 주시고, 비를 구하게 한 다음에 비를 주셨습니다. 거저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보십시오.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연이나 재수, 운으로 돌립니다. 하다 못해 조상 덕으로 돌리기는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주신 햇빛과 공기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자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그냥 주시면 우리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몰라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무엇이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다음에 주심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만 행운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 필요를 다 아시는데 뭘 그렇게 기도하냐고 하지 마십시오. 엘리야처럼 필요한 것을 조목조목 기도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42절입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우리 생각에는 엘리야 정도 되면 산에 올라가 하나님 하면 하나님이 즉시 응답할 것 같은데, 엘리야의 기도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땅에 무릎을 꿇고 그 무릎 사이에 자기 머리를 틀어박았습니다. 이런 자세가 어떻게 하면 나올까요? 야고보서 5장 17절이하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기도는 무엇으로 합니까? 입술로? 아닙니다. 온 몸으로 하는 게 기도입니다. 소리로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전 존재로 하는 게 기도입니다. 엘리야처럼 위대한 사람도 무릎 사이에 자기 머리를 틀어박았다면, 우리는 땅을 파고 머리를 묻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혀로만 기도하지 온 몸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이 기도의 간절함을 우리가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까? 이런 기도가 상달되고 이런 기도가 주님의 심금을 울리며, 이런 기도에 주님이 응답하십니다. 일 년에 한 번 기도해도 이렇게 자기의 존재로 기도하십시오. 소리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시간만 떼운다고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4절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주님도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41절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때는 아직 엘리야가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입니다. 놀랍게도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엘리야는 듣습니다. 큰 빗소리를 들은 겁니다. 엘리야는 이미 믿음의 귀로 빗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이게 기도의 진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비를 주십시오 하며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빗소리를 이미 믿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광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그 환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믿음과 확신이 아니라 이미 불신, 패배주의로 기도합니다. 혹시나 싶어 기도합니다. 이미 회의감에 사로잡혀 기도합니다. 그러니 기도가 응답될 리 없습니다. 기도하는 바를 이미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데, 비를 기도하면 믿음의 귀로 그 빗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종달새 알에서 이미 종달새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우리 기도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도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비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먼저 빗소리를 들어야 실제 비가 내립니다. 내가 바라는 것의 실상을 생생히 봐야 그 꿈이 현실이 됩니다. 제발 기도 응답에 대한 기대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시는 바를 이미 믿음의 눈으로 생생히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엘리야는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했습니다. 43절입니다.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은 만수입니다. 기도는 인내와의 한 판입니다. 기도는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기도의 시한은 응답받을 때까지입니다. 내가 시한을 정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기가 시간표를 짜놓고 거기에 하나님이 굴복하시길 윽박지르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시간에 하나님을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 되고 내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이 가장 이상적인 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때에 대한 분별이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뤄지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나님은 전체 그림을 다 보십니다. 그래서 언제 이뤄지면 좋을까 다 보시고 그때가 되어야 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유익하고 덕이 될 때 하나님은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르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인내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해서 당장 이뤄지지 않으면 포기합니다. 일곱 번이든 일흔 번이든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기도해서 결국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기도의 모범인 엘리야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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