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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m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처럼(마 6:25-34)

20120715m

마 6:25-34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처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이보다 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말씀처럼 황당한 말씀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이런 것들을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책임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장래의 일을 위한 계획이나 설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순이나 부조리가 없어야 한다는 건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우리가 염려를 제 아무리 주장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는 백해무익이라고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이 우선 염려의 비생산성을 지적하십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유대인들은 로마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신장이 작았습니다. 로마인들에 대해 신장에서 오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키 때문에 아무리 염려해봤자 염려한다고 키가 더 자라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공감했을 겁니다. 염려해서 키가 컸다면 제가 절대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이미 2m가 넘었을 겁니다. 염려한다고 1cm도 자라지 않습니다. 


또한 주님은 염려의 비신앙성을 지적하십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린 아이들이 왜 염려를 하지 않느냐면 아무리 못나도 자기 부모가 다 해결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는 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라기보다는 어린 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믿고 염려하지 않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엄마 아빠가 멀쩡한데, 어린 것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염려한다면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염려는 결국 내가 주님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끝까지 내가 지고 가겠다는 뜻입니다. 무슨 재주로 내 삶을 우리가 주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벅찬 삶의 짐을 지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신앙의 반대말이자 불신앙의 동의어입니다. 주님을 못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비생산적이고 비신앙적인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처방은 이겁니다. 내 삶의 근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라는 겁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28절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새가 살아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라거나, 새 깃털에 성경구절이 혹시 적혀있지 않나 해서 보라는 게 아닙니다. 새와 들의 백합화의 삶의 원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생존의 법칙을 보라는 겁니다. 저 공중의 새가 그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들의 한 포기의 백합화가 자기 능력과 재주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재주가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기르십니다. 그래서 굶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새들은 씨 뿌리지 않습니다. 수확을 하거나 창고에 쌓아두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굶지 않고 잘 자랍니다. 밤낮 걱정하고 염려하고 고뇌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한두 푼에 팔리는 미물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저토록 완벽하게 돌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건강하고 아름답게 입히고 키우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잘 돌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저 미물들도 하나님이 저토록 완벽하게 돌보신다면, 너희를 어찌 외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를 어찌 돌보시지 않겠으며, 너희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염려를 붙들어 매라는 것입니다. 제발 날아가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공중의 새는 독수리가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번역상 참새라고 했을 뿐이고 지극히 작은 새를 가리킵니다. 이름 없는 작디 작은 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이 지키고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믿음 없는 자의 필연적인 고뇌가 염려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뭘 그리 염려하십니까? 참새에게 하나님은 그냥 조물주이시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분신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미물의 풀 한 포기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지키고 먹이고 기르시는데,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염려하지 말고 아버지께 다 맡기라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고아십니까? 사생자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까이 계십니다. 남편보다 아내보다 자식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부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다. 어린 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염려하지 않듯이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루라도 속히 모든 짐을 주님 십자가 아래 내려 놓읍시다. 그래야 이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내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야 염려로부터 놓여난다고 합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에겐 의식주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리하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하나님이 해결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삶의 수순은 분명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 삶의 제1순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주가 제1순위라고 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하나님의 나라와 의냐 라고 합니다. 우리 논리가 항상 이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한 절대 염려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거꾸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히 의식주 문제가 삶의 제1순위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내 삶의 제1순위라고 고집하는 삶의 행태는 불신자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의 제1순위는 의식주입니다. 그렇게 사는 한 절대 염려로부터 자유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부디 가치관을 바꿉시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합시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좇아야 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절대 평생을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을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의식주를 내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최고의 가치요 0순위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역설적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염려로부터 해방된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도 탈 없이 세상을 살게 될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내 삶의 제1순위로 삼으면 하나님이 의식주 문제를 채우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뢰하지 않으니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다음은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염려로부터 놓여난다고 하십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새나 들꽃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은행이나 곳간, 창고에 먹을 것을 쌓아두고 살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날 양식을 그날 새벽에 나가 거두었습니다. 그날 먹을 양식만 거두게 되어 있었습니다. 안식일 전에만 이틀 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창고를 헐더라도 잔뜩 쌓아놓아야 안도합니다. 우리는 다 탐욕의 화신들입니다. 누구도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할 뜻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 불만이십니까? 더 많이 쌓지 못해 불평불만입니다. 탐욕이 하늘을 찌릅니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으로 살라고 했고, 그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라고 했는데, 우리의 불평과 불만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이 갖지 못해, 더 갖지 못해 감사하지 못합니다. 아주 사악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에 감사했습니다. 부디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십시다. 본래 우리 기독교 전통은 무소유입니다. 주님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어거스틴, 프랜시스도 그랬습니다. 다 그 사람들은 다 거룩한 거지였습니다. 기독교의 여러 미덕 가운데 청빈이 으뜸가는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절대 무소유가 복이 아닙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저주입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한국 교회도 돈이 많아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는 그래도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게 많습니다만,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하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왕창 주시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물질이 저주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 저층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 믿고 3,4대 지나며 부자가 된 후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알부자들은 다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이 본질을 잃기 시작했고 기독교는 완벽히 개독교가 되었습니다. 목사도 가난할 때는 긴장해서 성실히 목회했는데, 이제는 다 맛이 갔습니다. 목사가 아니라 먹사가 되었습니다. 원래 주님은 가난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청빈을 주문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통장에 돈 잔뜩 넣어두는 것은 다 비성서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통장 믿고 살지 주님 믿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절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날마다 불만불평입니다. 더 많이 주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죄악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해가는 겁니다. 제발 가진 것으로 감사하며 자족하며 사십시오. 그래야 염려로부터 해방됩니다. 올해는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적인 의식주 문제에 대한 시름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염려 주께 맡기시고 탐욕이나 불평보다 오히려 자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복된 성도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PxE2LSi2L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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