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절망(욥 17:1-5)

2012. 6. 28.

절망

욥 17:1-5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거나 결백을 입증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듭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3주는 살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은 살 수 있으며 공기가 없어도 3분은 살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단 1초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욥이 지금 바로 그런 시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절망감이 너무 심해 이제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완벽한 체념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무덤이 준비됨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12절).

욥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나 내적 충동이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기운이 쇠했고, 날이 다했고, 무덤이 준비됐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절망하면 이토록 참담할까요? 꼭 신해철의 <절망에 관하여>를 듣는 느낌입니다. <뜨겁던 내 심장은 날이 갈수록 식어 가는데 내 등 뒤엔 유령처럼 옛꿈들이 날 훼방하며 서 있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떼어 놓지만 갈 곳도 해야 할 것도 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냥 가보는 거야 그냥 가보는 거야 ….>


조롱하는 자들이 함께 있음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2절).

욥은 세 친구들이 실은 자기의 모든 희망을 고갈시키고 절망하게 하는 장본인들이라고 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들은 욥을 무자비하게 단죄하고 온갖 더러운 비난과 조롱으로 그를 능욕했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도발하는 그들을 날마다 대면해야 한다는 데 욥의 죽음 같은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아픔이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날마다 보며 살아야 하는 운명 또한 고통 이상의 고문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보기 싫은 사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 아예 교회 나가기가 싫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 좀 교회에 안 나오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까지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인간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내가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자기의 소중한 친구로 생각할까를 늘 냉정하게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없음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3절).

욥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자기의 손을 잡아 줄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붙들어 달라는 탄원입니다. 어느 험한 길을 가며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아빠 손 꼭 잡아라!> 그러자 어린 딸이 말했습니다. <아니, 아빠가 내 손을 잡아 주세요!> 아빠가 물었습니다. <네가 잡는 것과 아빠가 잡는 게 뭐가 다르니?> <나는 자칫 아빠 손을 놓을 수도 있지만 아빠는 언제나 날 든든히 잡고 계실거잖아요!> 혹 당신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다고 욥처럼 절망하지 마십시오. 혹 내가 잡고 있는 주님의 손을 놓칠까 노심초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나를 안전하게 붙잡고 계십니다. 나는 때로 그분의 손을 놓칠 수도 있지만 그분은 절대 내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