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내게 들으라(욥 15:17-35)

2012. 6. 16.

내게 들으라!

욥 15:17-35


엘리바스는 먼저 욥에게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고 주문합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17절). 사람은 누구나 남의 말은 쉽게 단죄하면서도 자신의 말이나 생각은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엘리바스도 욥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외면하면서도 자기가 하려는 충고에 대해서는 <내가 친히 본 것>이고,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18절)이라며 경청하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져 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20절).

악인들, 특히 포악자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시달리고 극히 불안한 삶을 살다 결국은 비참하게 죽는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이런 논조를 길게 이어가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경스럽게 대드는 자도 그같이 멸망할 거란 암시로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포악자에 빗대 욥을 위협하는 저주입니다.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26-30절). 그렇습니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얼굴에 찐 살도 허리에 오른 기름도 결코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약한 자들을 수탈하여 사치와 무절제한 삶을 살아왔으므로 마치 불꽃이 나뭇가지를 말리듯 필히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당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아닙니다. 욥은 결코 그런 악인이나 포악자가 아니었으므로 엘리바스가 잘못 조준한 것입니다. 


악한 자는 스스로 속을 것이라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31절).

왜 아니겠습니까? 악한 자는 늘 제 꾀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굳이 악한 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남보다는 자신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속으며 삽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다 결국은 <이게 전망이 좋은 업종이라면 사업자들이 더 많을텐데 …>하며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경우는 사업자가 많았어도 아마 <이건 너무 경쟁이 심해!>하며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을 합리화하여 자기가 염려하는 부정적인 조건에 끼워 맞춘 결과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경우요 자기에게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무슨 일이건 자기의 개성이나 적성에 다 맞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그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잔꾀나 꼼수가 아니라 성실과 열심을 다해 임하면 결코 제 꾀에 제 스스로 넘어갈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악한 자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속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치 못한 자는 재난을 잉태할 것이라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35절).

그래, <뇌물을 받은 자>(34절)가 어찌 무사하며 복되겠습니까? 최근의 저축은행 비리나 대통령 측근 비리 등도 다 뇌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권력이 바뀌어도 뇌물 비리는 여전하고 또 그런 경건하지 못한 무리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지체시키고 때로는 큰 재난을 겪게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이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는다>는 말씀은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경건한 자가 우리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소금으로 빛으로 경건하게 살아야 우리 사회가 변하고 복됩니다. 뇌물을 주고받는 악한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와 역사에 화와 재난을 부르는 암과 같은 존재들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