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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은 원래 현군이라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치러낸 전제군주의 전형이었습니다. 부왕 다윗시대의 내노라 하는 일등공신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개혁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런 가혹한 정치적 숙청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과거 군부에서 가장 존경받던 덕장 우리아의 아내였고, 그 우리아의 죽음에 요압장군이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솔로몬의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후에 솔로몬의 이복형제 아도니아가 요압과 손잡고, 그동안은 전혀 기를 못 펴던 친우리아 세력과 나단 선지자가 솔로몬을 지지하고 나선 사실도 이미 그 싸움이 피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암투와 모살이 뒤엉킨 처절한 권력투쟁 끝에 드디어 왕권을 거머쥔 어느 날 솔로몬이 소위 <일천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많은 백성들을 내가 어떻게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왕상 3:9)하며 호소했다는 것은 막상 다스리는 일을 맡고 보니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칼을 휘두르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마치 정적을 제거하듯 하면 민심이 떠날 것이고, 그저 주먹 한 번 휘두르면 끝날 일인데도 참자니 속이 터지고,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정말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혜를 얻었다는 것은 단순히 영특해졌다거나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다기보다는 그의 통치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문제란 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 힘으로는 절대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자각, 사람을 살리는 정치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확신이 그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로써 그는 자칫 포악한 군주가 될 뻔한 기로에서 다시없을 현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의 본질은 냉혹하기 짝이 없던 존재가 사람을 무 자르듯 처단하던 칼의 논리를 버리고 이제는 생명 구하는 일을 자신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은 바로 그런 그의 신념을 확인시켜 준 매우 값진 사건이었습니다. 몸을 파는 두 여인이 씨를 알 수 없는 아기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창기의 아이를 두고 그가 누구의 아기인가를 가린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놀랍게도 솔로몬은 당황하거나 격노하지 않고 정색을 하며 <칼을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모두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어쩌자는 것인가? 하기야 소유권을 확정짓는 방식으로 칼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고 저 것은 네 것이라며 날카롭게 칼질을 하는 게 가장 편리합니다.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왕상 3:25). 그러자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생명과 소유의 대립>입니다. 칼은 소유를 확정해 주는 대신 생명을 앗아갑니다. 반면 소유를 포기하면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솔로몬의 지혜는 그 첨예한 대립의 와중에서도 결국 생명의 힘이 칼의 힘을 이길 것이라 굳게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잠결에 자기 아이를 죽인 여인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생명 죽이는 일쯤은 상관없다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지금도 부모의 과도한 욕심과 기대와 허영이 칼이 되어 자식들의 생명을 짓누르는 가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 역시  훗날 칼을 휘둘러 소유의 경계를 정하는 사회를 당연시하며 소유대신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비웃는 사람이 될 게 뻔합니다. 지혜란 다정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지는 것이고, 그 품에서 칼마저도 녹이며 새로운 꿈을 잉태하는 열정입니다. 부디 교활한 <꾀>가 아니라 솔로몬처럼 <지혜>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