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0m 혼인과 독신(고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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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0m 청년주일
본문: 고전 7:1-9
제목: 혼인과 독신
(고전 7:1-9, 개정)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가톨릭의 신부와 개신교 목사 중에 어느 쪽이 더 경건하고 신앙적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신부가 더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신부는 독신인데, 목사는 결혼했으니 세속적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혼인을 하는 게 성서적입니까? 독신이 성서적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보다는 가톨릭 신부 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바울은 독신주의자, 금욕주의자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선교하느라 혼기를 놓쳐서 본의 아니게 독신으로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나름대로 신념이 있어서 독신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신부나 스님들도 독신이라기보다는 독신주의자들입니다. 신념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겁니다. 본문을 봐도 바울은 확실히 독신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1절 하반절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7절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8절도 보십시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결혼 안 한 청년들이나 과부들에게 자기처럼 독신으로 지내라는 겁니다. 반면에 혼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입니다. 2절입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과 아내를 두는 이유를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9절도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의 말이 심해 보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절제하지 못해 결혼한 겁니까? 자기는 정욕을 절제할 수 있었기에 독신으로 지냈다는 겁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난감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결혼을 안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결혼하는 게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혼인을 반대하거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을 통해 금욕을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본문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진의를 곡해하는 것입니다.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자기 개인으로는 사람들이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기를 바라지만, 결혼이나 독신은 결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은사라고 합니다. 사람에겐 이상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형을 만나서 결혼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자기 원대로 결혼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사대로 됩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대로 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나 정서로는 자기처럼 독신으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으나 그것은 자기 욕심이고 혼인이나 독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7장 17절 이하도 보십시오.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할례도 좋고, 무할례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존중해서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7장 24절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결혼이나 독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은사대로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의 은사를 받은 것이고, 독신은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겁니다. 결혼했다 해서 더 세속적이라 볼 필요도 없고, 독신이라 해서 더 종교적이며 신앙적이라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독신이 더 세속적일 수도 있고, 결혼생활이 더 신앙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독신주의였다거나 금욕주의였다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은사대로 산 것 뿐입니다. 자기의 소명대로 지낸 것뿐입니다. 성경에는 독신주의도 없고, 금욕주의도 없습니다. 또한 반드시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존중하면 족합니다. 순리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팔자를 고치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며, 오늘은 청년주일이고, 내일은 성년의 날이자 부부의 날입니다. 작년에 결혼은 31만 9천 건, 이혼 건수는 11만 5천 건입니다. 3쌍 결혼하고 1쌍이 이혼한 셈입니다. 작년 이혼 상담 건수는 총 16만 건이라고 합니다. 결혼대비 절반이 작년에 이혼을 하기 위해 상담을 받았거나 실제 이혼을 했다는 얘깁니다. 실제 이혼은 30%지만 이혼 위기의 가정은 50%라는 얘깁니다. 특히 이혼을 고려하는 세대가 40대와 60대라고 합니다. 이 두 세대가 가장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의 이혼율이 없습니다만, 미국에는 기독교인 이혼율이 30%라고 합니다. 일반가정은 27%라고 합니다. 일반가정보다 더 이혼율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성경은 이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여러분이 결혼하실 때 주례자가 마태복음 19장 6절 말씀을 인용해 성혼선포를 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는 절대 이혼을 못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가정이기에 사람이 인위적으로 파괴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원초적인 창조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 10절 이하를 보십시오.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말라기 2장 16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이게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도 하루에 300쌍씩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믿는 사람이 몇 퍼센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으신 가정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안 됩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이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성경도 인정은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금하지만 예외적으로는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는 이런 때입니다.
첫째, 배우자가 나에게 신앙의 양심을 배반하라고 강요할 때입니다. 배우자가 나의 양심의 자유를 유린할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2절 이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결혼할 욕심으로 결혼하면 교회 다니겠다고 해놓고, 결혼 후 해가 갈수록 못된 짓하는 남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어쨌든 신앙적으로 이혼이 허락되는 케이스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는 겁니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내가 믿는 자인데 하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그것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깨라는 강요기에 이혼이 아니라 순교도 불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배우자의 음행입니다. 주님도 마태복음 19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음행이라면 갈라서는 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음행마저도 자동적으로 이혼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용서와 기회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도록 기다리는 게 맞다고 합니다. 호세아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수 없이 가출하고 심지어는 아이도 낳았지만 끝까지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삽니다. 그게 성서적으로 옳으나,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 배우자의 음행이 용인이 안 되면 이혼해도 좋다는 겁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으면 최대한 용서하고 기회를 주라는 것 또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자기 관리에도 철저해야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관용 또한 필요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에워싼 대중문화가 전방위적으로 우리를 미혹하고 시험합니다. 누구도 절대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혹 자기 파트너가 실수를 했다 해도 일단은 용서하고 기회를 주는 게 맞습니다. 자기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과 문화, 환경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셔서 늘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빕니다.
청년들도 혼인과 독신 문제에 더욱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기를 부탁합니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_byMt0iCn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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