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422m: 불편한 진실(막 3:1-6)

2012년 4월 22일 주일낮예배

본문: 막 3:1-6

제목: 불편한 진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1절 상반절을 보면 <회당>이 나옵니다. 회당은 헬라어로는 <수나고게>요, 히브리말로는 <에다>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지방에는 다 회당입니다. 왜 성전은 하나일까요?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는 법궤 곧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두 돌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언약궤가 있어야 성전이 성립됩니다. 언약궤가 하나이기에 성전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방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 회당에서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중에는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회당은 성전 기능도 하고 학교 기능도 했습니다.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게 자녀교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은 유대교의 본산입니다. 유대민족의 오랜 전통의 구심공간이 바로 회당입니다.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망하는데, 그때 예루살렘에서만 100만이 죽었고, 수십만이 포로로 잡혀갔고, 또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망명한 그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만 아니라 잘 아시는대로 유대인의 역사는 파란만장했습니다.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망명을 많이 했습니다. 구약시대까지 합치면 유대인들은 거의 3000년간 디아스포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언어, 그리고 전통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든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면 회당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모여 자기들의 언어로 율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해외로 많이 나가서 사는데, 2, 3세대만 가도 우리나라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2,3천년이 지났음에도 언어를 잃지 않습니다. 수나고게에 모여 자기들의 언어로 대화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율법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고 유대인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수나고게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공동체의 회당이 기독교 공동체의 교회의 전신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본래 교회는 헬라말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회당인 <수나고게>가 구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말 회당 단어인 <에다>와 교회 라는 의미의 <칼>도 구분 없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에다>는 공동체 개념이 강하고, <칼>은 모임이란 뜻이 강할 뿐입니다. 회당은 선민공동체의 의미고,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회당을 주목하는 이유는 교회의 전신이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시대의 회당을 살펴 보겠습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회당이나 교회에는 멀쩡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선민공동체요, 교회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이니 다 건강하고 장애 없고, 영육 간에 반듯한 사람만 모이면 좋겠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대일 뿐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이 회당 안에서 많은 장애인을 고치십니다. 1장에도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안수하여 고치십니다. 3장에도 1절부터 이미 한 쪽 손 불구자를 고치십니다. 6장에도 각색 병자를 안수하여 고칩니다. 이게 다 회당 안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병원과 같습니다. 주님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 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데, 나는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우리 기대와는 달리 온갖 환자, 장애인이 다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온갖 장애를 가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이게 현실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교회생활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 장애인이어서 그렇습니다. 손발이 생각만큼 맞지 않습니다. 호흡이 생각만큼 척척 맞지 않는 것은 다 장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잡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면 나만 온전하고 다른 사람은 다 장애인일까요? 이것 또한 나만의 착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나도 장애인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습니다. 그동안 교회생활을 하시며 여러 장애인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시험을 당했습니까? 이해하십시오. 양해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나도 남 못지않게 다른 사람에게 시험, 아픔,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적 없다. 천만에요. 목사도 성도들을 무참히 해쳤지만, 성도들도 목사에게 아픔과 시험을 줍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민폐를 끼치며 삽니다. 절대 나는 아니다고 하시지 마십시오. 이것이 현실 교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교회에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주님을 고발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4절 말씀처럼 절대 악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주님을 모함하고 고발하려고 합니다. 5절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이런 사람들도 회당 안에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6절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회당 안에 주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수작하고 작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회당이요 현실 교회입니다. 교회는 절대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건강한 자들이라기보다는 병든 자들의 공동체요, 의인이라기보다는 죄인의 공동체가 맞습니다. 바울이 직접 개척하여 3년 반 동안 목회했던 신약의 대표적인 교회가 에베소교회입니다. 바울이 한 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교회는 에베소교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기대와는 달리 에베소교회조차도 이상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도 죄를 짓지 말라.”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하지 말라.”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이 얼마나 실망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사실 이게 바로 적나라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하기에 시험에 들고 실망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천국 같은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보다 냉정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죄인의 공동체이자 동시에 의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데도 의인으로 쳐주는 공동체입니다. 죄인임에도 의인으로 간주해주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희한하고 역설적인 공동체입니다. 틀림없이 죄인인데 의인으로 불러준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 맞는데 주님이 우리 대신 죽고 심지어 지옥까지 가 주셨기에 우리를 의인으로 칭해주십니다(justification). 분명 현실적으로는 의인이 못 되는데, 오히려 예수를 믿으며 여전히 죄만 짓고 사는 죄인인데 이제는 의인입니다. 순전히 주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죄인이면서 의인, 의인이면서 죄인>이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죄인이나 하나님 눈에는 의인이라는 겁니다. 이 역설, 이 변증법을 알아야 신자의 정체를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옛날 노아의 방주와도 같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분명 구원의 방주였음에도 절대 쾌적하지 않았습니다. 좁고 답답하고 늘 시끄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방주는 노아 가족의 유일한 구원의 수단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교회를 뛰쳐나가고 싶으십니까? 노아의 방주도 그랬습니다. 여러분을 책 잡기 위해 엿보고 모함하고 송사하는 사람이 있어 시험에 들고 아픔을 겪으셨습니까? 일찍이 주님도 회당에서 그렇게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현실 교회의 한계요 모순이며 불편한 진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주님은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자기를 모함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 그 회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가르치고, 환자를 치유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회당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온갖 한계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결코 교회를 등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모순에 찬 교회임에도 여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이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우리 이웃에 있는 교회가 큰 시험과 아픔을 겪으며 결국 교인들이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남고, 일부는 따로 나와 오늘 창립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서 교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으나 어쨌든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빨리 수습되는 게 좋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이번에 상처를 입고 아예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적지 않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떠난 분들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목사에게 시험을 들고 고통을 겪었다 해서 교회를 등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교회에 계십니다. 거기에서 구원사역을 행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엄연히 교회에 계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불구가 된 손도 내밀고, 상처 받은 영혼도 내놓으십시다. 치유 받고 온전하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이 마지막 시대의 구원의 방주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iN87TZtkJ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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