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어느 때까지(욥 7:19-21)

20120414 

어느 때까지 

욥 7:19-21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19절).

이는 곧 <주께서 이 매운 회초리를 어느 때까지 내게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침 삼킬 동안도 그 혹독한 회초리를 그치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계속 하시겠느냐>는 비탄의 물음입니다. 욥은 병이 목까지 차올라 이제는 거의 침조차 삼키기 어려운 상황이 된 듯합니다. 그래서 <나를 숨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나를 채우셨다>(9:18)고도 합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까 …>(20절).

다윗도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 <마음의 비밀>(시 44:21)까지도 훤히 다 살피고 계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시며 지키시고 샅샅이 살피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시 7:9). 매순간 우리의 앉고 섬을 아시고 먼 데서도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욱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삼가십시오.


어찌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20절).

과녁도 과녁 나름입니다. 우리나라 양궁선수들의 과녁이라면 얼마나 빛나고 영예롭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욥이 말하는 과녁이란 죽음 같은 고통의 과녁, 처절한 시험과 시련의 과녁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아픔의 과녁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자기가 하필이면 그런 하나님의 모진 과녁이 되어 날카로운 화살촉에 꿰뚫리는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욥의 이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나이까>하는 탄원은 마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신 주님의 최후 탄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그 버림당하심을 통해 당신의 구속의 뜻을 이루셨듯 욥의 과녁 삼으심을 통해서도 당신의 고난의 경륜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흙에 누우리라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21절).

욥이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게 은총을 베풀고 싶으셔도 더 이상 나를 찾으실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자신의 죄와 허물을 부정하며 자신의 죄인됨을 완강히 부인하던 그가 여기서는 <어찌하여 내 허물, 내 죄악을 사해 주지 않느냐>는 고백까지도 불사합니다. 즉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해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머지않아 우리 모두를 흙에 누일 것입니다. 누구도 그 숙명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욥처럼 <내 허물, 내 죄악을 제거해 달라>는 사죄의 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둔 존재의 가장 엄숙하고도 진지한 최후 기도는 보다 깊은 회개의 기도임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