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01m: 비운의 무화과나무(막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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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일 주일낮예배/종려주일
본문: 막 11:12-25
제목: 비운의 무화과나무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왜 종려주일입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주님이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 믿고 환영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저녁에 다시 성 밖에 있는 베다니 나사로 집에 가서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고난주간 월요일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때 벌어진 사건입니다. 주님이 가두에 선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열매가 없어서 주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데, 뿌리째 마른 것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들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원래 가두에 있는 무화과는 여행객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시장해서 무화과 열매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 이튿날 다시 그 무화과나무를 보니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우선 이 사건은 주님의 정서와 잘 맞지 않습니다. 주님이 남을 죽이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는데, 이 사건은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죽인 기적입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필요로 기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할 때도 마귀가 널린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했을 때도 가차 없이 시험을 물리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은 엄연히 주님의 개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자 저주를 하신 사건입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으셨기에 아주 이례적인 기적입니다. 이것보다 더 황당한 것은 13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때는 무화과 열매철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 이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제철도 아닌 나무에게서 열매를 찾으신 것도 이해하기 힘든데, 그런 나무에다 대고 주님이 저주해서 나무를 뿌리째 말라 죽게 하셨으니 정말 주님답지 않습니다. 설마 주님이 무화과 철을 모르고 실수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히 우발적인 헤프닝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뭔가 의도된 퍼포먼스였다는 겁니다.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희생양 삼아 주님이 뭔가 의도한 게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게 무엇일까요? 이 사건은 잎사귀만 무성했던 예루살렘 시민들을 향한 주님의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주님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야말로 잎사귀만 무성했지 어디에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그들에게 경종을 울리신 겁니다. 겉만 번지르한 그들에게 매우 현장감 넘치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신 열매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예배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십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 양 파는 사람들 등을 채찍으로 몰아내시고, 집기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비둘기, 양, 염소, 돈 같은 것은 다 예배 때 바치는 제물입니다. 헌물이자 성전세를 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엎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예배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세속화되고 모든 게 장삿속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성전과 예배가 얼마나 거창했으며 아름다웠습니까? 제물이 얼마나 차고 넘쳤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 무성한 잎사귀였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성전을 두고 강도의 소굴이라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는 비둘기, 양, 헌금, 십일조 같은 게 아닙니다. 내 몸을 요구하십니다. 내 존재, 내 삶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은 돈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우이웃돕기 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우리의 존재를 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시민들은 양이나 비둘기, 염소는 잘 바쳐도 자기들의 몸은 안 바친 겁니다. 그러니 다 잎사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인데, 어디에도 열매는 없었다는 겁니다. 죽은 짐승 바치는 것은 죽은 제사입니다. 살아있는 내 몸을 바쳐야 그게 산제사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죽은 짐승만 바쳤지 자신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막 몰아내신 겁니다. 신사적으로 몰아내지 않고 채찍을 휘둘렀고, 다 뒤집어엎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내 존재 전부를 헌상하는 결단입니다.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를 바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주님은 절대 껍질이나 잎사귀에 속지 않으십니다. 기만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쇼하면 다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다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22-23절입니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삼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불도저나 포크레인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내 앞에 산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올해도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산들이 놓여있습니다. 힘이나 물리적인 것, 돈으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들어 바다에 던져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부디 잎사귀 말고 믿음의 착실한 열매를 맺읍시다. 나는 모태신앙이네, 나는 유아세례 받았네, 내 교회 직분은 뭐내, 부모가 장로 권사네. 이것들은 다 잎사귀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을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 했습니다. 올해는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읍시다.
그리고 기도의 열매입니다.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중언부언하는 기도 아닙니다. 형식적인 기도 아닙니다. 믿지도 않는 기도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기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는 남에게 보이려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거리, 시장 어귀에서 기도했습니다. 슬픈 기색과 머리를 헝클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조차도 철저히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잎사귀만 무성했지 그들의 삶에는 어디에도 기도의 참된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기도는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게 아닌데 들어온 것으로 믿으라는 겁니다. 이런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이런 기도를 드리면 그대로 된다는 주님의 생생한 육성입니다. 이게 기도의 진수입니다. 이게 주님이 일러주신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 했습니다.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생생한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겁니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땅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며 폭우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이런 기도를 바치는 자가 기도 응답의 풍성한 열매를 수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이렇게 선제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불신으로 기도합니다. 자기가 기도하면서도 자기 기도가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다 반신반의하거나 만의 하나 응답되면 요행이라 생각하고, 응답 안 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신과 패배주의에 물든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는데 응답이 되었다면 그건 실수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해도 그게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항상 비굴하고 비겁합니다. 적선을 구하고만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열매에 목말라 계십니다. 그래서 늘 내게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부디 주님을 실망시키지 맙시다. 속이지도 맙시다. 주님께 기쁨과 보람을 안겨 드립시다. 주님의 기대에 부응해서 올해는 풍성한 열매를 바칩시다. 예루살렘 가두의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를 꼭 기억하십시다. 얼마나 보기에 풍성했습니까만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더는 자신을 속이지 말고 시장하신 주님을 기만하지 맙시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까지 실물로 경고하신 그 경고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입시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CwcQwNOsn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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