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325m: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벧전 3:18-19)

* 설교 녹화에 문제가 있어 설교문만 게시합니다.


2012년 3월 25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다섯째주일

본문: 벧전 3:18-19

제목: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현대신학의 흐름 가운데 구속사 신학(Heilsgeschichtliche Theologie)이란 게 있습니다. 이 신학의 대가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했고 지난 1999년에 소천한 오스카 쿨만입니다. 그분이 쓴 논문 가운데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란 게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논문입니다. 그 논문에 보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날카롭게 비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변명>, <파이돈> 등의 책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행보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사람들을 선동하고 타락시킨다, 전통적으로 섬기던 신 외에 다른 신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개했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외국 망명 등을 통해 살 수도 있었지만 <악법도 법이다>며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는 죽음을 너무도 당당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영혼불멸에 관한 긴 토론도 제자들과 함께 벌입니다.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는 제자 크리톤에게 자신이 친구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으니 대신 갚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최후는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만큼이나 여유로웠습니까? 너무도 대조적이고 참혹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떠는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굴해 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며 피땀 흘리며 기도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가능하다면 이 잔을 좀 옮겨 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독배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보면, 주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살려달라며 호소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치며 운명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대체 어디서 온 차이일까요? 쿨만은 그 차이를 소크라테스와 주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을까요? 희랍의 전통사상이 그렇듯이 철저히 이원론적이었습니다. 영과 육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영혼이 참입니다. 영혼이 빛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합니다. 육은 어둠입니다. 육은 거짓이며, 영혼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족쇄입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면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희랍 사람의 궁극적 구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으로써만 영혼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이원론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의 전통은 어떻습니까? 헤브라이즘의 죽음은 어떤 겁니까? 여러분, 주님은 의인으로 죽었습니까? 죄인으로 죽었습니까? 주님의 존재 자체는 의인이셨으나, 십자가를 지실 때는 유사 이래 둘도 없는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린 겁니다. 죄인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의인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주님은 죄인으로 죽으셨기에 죄인이 죽어 가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지옥에 가셨습니까? 아니면 천국에 가셨습니까? 아니면 연옥에 가셨습니까? 아니면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어서 구천을 떠돌다가 3일 후에 부활하셨습니까? 주님은 흉악한 죄인으로 돌아가셨기에 당연히 지옥에 가셨습니다. 이것이 신성모독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고 돌아가신 후에 지옥에 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주님 자신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그토록 고뇌하고 몸부림 친 것입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체적 고통이 두렵고 무서워 몸부림 친 게 아닙니다. 지옥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속론의 백미입니다. 만일 주님이 지옥 안 가셨으면 우리도 가야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대신 지옥 가셨기에 우리는 천국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속론은 우리가 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주님이 대신 당했다는 게 전부입니다. 이것이 대속이요 속량이요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여러분이 거북하다 해도 이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구원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지옥행이 두려워 몸부림 친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구절은 대단히 난해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난해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어서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건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신경입니다. 교회가 2세기부터 즉 교부시대 때부터 고백해온 신앙고백 문건을 주후 750년에 와서 공인한 것(포르마 레쳅타: Forma Recepta)이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나라 사도신경은 다른 나라 사도신경과 다른 대목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다른 나라와 같습니다만, 우리나라 개신교만 다릅니다. 찬송가 앞쪽에 나와 있는 사도신경을 보십시오.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에는 있으나 우리나라 개신교는 뺐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만 이 대목을 감정적으로 뺀 겁니다. 정서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는 뜻이지요. 주님이 지옥에 가셨다니 무슨 망발이며 신성모독이냐는 논란을 피하려고 고의로 가장 중요한 대목을 뺀 겁니다.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야 할 지옥을 대신 가셨습니다. 이게 대속이요 속량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너무나 중요한데 우리 개신교는 뺐습니다. 주님이 이 때 지옥에 안 가셨다면 우리가 가야합니다. 주님이 지옥 형벌을 먼저 당해주셨기에 우리는 안 가도 되는 것이며,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게 제대로 된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지옥에 가심으로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게 복음의 진수 아닙니까? 기독교는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지옥 가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죄를 지고 지옥에 가셨다면, 왜 딱 사흘만 계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몸값이 비싸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주님이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전 인류의 생명과도 바꾸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종신형이지만, 주님은 너무도 값진 분이시기에 사흘 계시는 것으로도 전 인류의 죄의 값을 갚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모든 인류의 죄를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피를 보혈(寶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보면서 우리의 죄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 구원의 분명한 물증이요 담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통해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확신하십시다. 나를 위해 지옥까지 가 주시고, 거기서 내 죄의 값을 다 치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