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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20318m: 실패와 회복(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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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2년 3월 18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넷째주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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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본문: 마 26:69-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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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제목: 실패와 회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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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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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수제자를 자처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얘기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천추의 한이 된 뼈아픈 사건인데, 어쩌다 그가 그랬을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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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선 너무 경솔한 장담 때문이었습니다. 허세와 허풍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입니다.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드시며 떡과 잔으로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식을 마친 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입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가 대뜸 33절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34절에서 다시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때도 베드로는 35절에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있는 대로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큰소리 칠 일이 아닙니다. 장담이 금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허무하게 주님을 배신한 겁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 그것도 부인한 정도가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키에르케고르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있는 대로 큰소리 치다가 그렇게 참패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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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다음은 졸다가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고 있습니다. 40-41절입니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대체 어떤 때입니까? 주님 생애에 가장 긴박하고 위급한 순간 아닙니까? 적어도 이때는 깨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주님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겠습니까? 나와 함께 깨어 있자,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당부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잡니다. 누가복음 22장의 이 대목을 보면 주님은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이 와서 깨웠음에도 제자들은 잤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주님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시험에 들고 실패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난은 여기서 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영혼이 마귀의 타겟입니다. 깨어 근신하는 영혼은 마귀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잤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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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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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왜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졸거나 잘까요? 주님이 지적하시기를 ‘마음에는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 치고 깨어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면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기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제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새벽 1시에 자는데 어떻게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사도도, 천하의 베드로도 별 수 없습니다. 시험에 들고 실패합니다. 마귀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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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뿐만 아니라 주님을 좇을 때 멀찍이서 따랐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8절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이게 또한 베드로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나와 주님 사이에 마귀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을 보이면 안 됩니다. 주님 따르는 데는 안전거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왜 멀찍이서 따랐을까요? 여차하면 달아나기 위해서입니다. 고의로 멀찍이서 따른 겁니다. 부지런히 주님을 따라가야지 멀찍이서 따르다가는 주님을 놓칩니다. 양들도 목자를 바짝 좇아가야 합니다. 먼 산 살피다가는 길 잃은 양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도 지금 그렇습니다. 달아나기 위해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멀찍이서 주님을 따랐던 겁니다. 주님과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멀면 멀수록 위험합니다. 항상 밀착거리로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연인 사이도, 부부 사이도, 친구 사이도 틈이 생기면 안 됩니다. 최대한 거리를 좁혀야 합니다. 밀착해야 합니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는 결국 파경에 이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틈을 두지 마십시오. 고의로 멀찍이서 따르지 마십시오. 황당한 것은 가끔 교회생활 오래한 분이 초신자들에게 충고할 때 교회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 일에 너무 발을 깊이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많이 알면 다친다고 합니다.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이게 약은 처신일 수는 있으나 절대 옳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수 십 년을 믿어도 항상 그 자리거나 아니면 지리멸렬하여 도태됩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 주님이 가장 거북해 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내 입에서 토해낸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가장 역겨워 하는 사람은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멀찍이서 따르다가 실패했던 베드로의 안전거리를 생각하시며 다시 한 번 나와 주님과의 거리를 확인하시고 바짝 거리를 좁히십시오. 밀착하십시오. 그게 복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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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다음은 하인들과 함께 앉았다가 망했습니다. 58절 하반절입니다.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베드로가 지금 강도를 잡듯 주님을 붙잡아 와서 희롱하고 모욕하고 때리며 온갖 몹쓸 짓을 하는 무리들 틈에 껴안아 숯불을 쬐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습니다. 이게 틀린 겁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인데, 구별된 백성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세상문화에 함부로 동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고유의 정체성도 잃고, 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사는 게 틀렸다고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쉽진 않으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현주소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 곁에 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 틈에 끼어 숯불을 쬐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이따금씩 주님께 곁눈질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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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이렇게 참혹한 실패를 맛 본 베드로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베드로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열악한 세상문화 가운데 노출되어 있고 육신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주목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단순하고 다혈질이어서 누구보다 실수가 잦았고 실패했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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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선 그는 주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75절).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데, 베드로는 미물인 닭소리를 듣고도 깨달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나서 하인들 틈에서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십자가 위에 닭 모양의 첨탑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십자가는 없고 장닭만 있습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킨 바로 그 닭입니다. 회개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좌절하고 실패할 수 있고,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회개에 민감해야 하고 용감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회복되고 삽니다. 교회는 회개의 집입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 주님 말씀을 기억해내었습니다. 밖에 나가 눈물로 통회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는, 주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가룟 유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하며 자복한데 반해,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자살합니다. 회개와 자살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입니다. 죄는 같습니다. 여러분, 부디 베드로의 영적 순발력을 배웁시다. 베드로처럼 말씀을 기억하고 자복하고 통회합시다. 그러면 용서 받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복귀시킵니다. 눈물의 회개를 통해 베드로는 여전히 수제자의 자리를 지킵니다. 베드로를 귀감으로 삼읍시다. 비록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함으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복된 성도들 되십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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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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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a h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XpAj_yH7Jzg$">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XpAj_yH7Jzg$</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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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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