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318n: 피 뿌리는 예식(히 11:24-28)

2012년 3월 18일 주일오후예배

본문: 히 11:24-28

제목: 피 뿌리는 예식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구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만, 모세는 참으로 영웅적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출생에서 생명을 보존한 것부터 기적이고, 가시떨기나무에서 소명을 받은 것도 신비였고, 바로로부터 백성을 진두지휘하여 출애굽한 것도 한 편의 위대한 드라마요, 마지막도 저 요단 건너편의 땅을 바라보며 비스가산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시체를 감춰 사람들이 그를 못 찾았다고 합니다. 죽음마저 신비에 가려져있습니다. 모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애굽을 떠난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믿음을 얘기하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누구나 믿음의 진정한 첫 걸음은 애굽을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쉽지 않습니다. 왜 애굽을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까? 애굽에는 모든 즐거움과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 애굽을 단호히 떠났습니다. 이게 그의 위대함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우리가 못하는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26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애굽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겁니다. 25절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26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합니다. 모세가 바울처럼 신약시대 사람도 아닌데 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입니까? 모세가 그리스도를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모세가 언제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당했습니까? 그런데 26절은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당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모세는 물론 자기의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어도 모세의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해석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난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이 누리는 큰 은혜요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 고생도 하고, 수모도 당하는데,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고생을 당신을 위해 당하는 것으로 해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약시대 사람인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생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세가 그 모든 수모를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크게 여긴 이유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희생과 아픔에 상당하는 상을 베푸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했는데, 우리가 애굽과 쉽게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가 세상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라고 했는데, 세상 즐거움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잠시>입니다. 모세는 세상 즐거움의 이 <잠시>라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의 보화, 즐거움을 택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모를 택한 것입니다. 애굽의 즐거움이 아무리 달콤하고 현란해도 그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난에 대해 보상으로 주시는 복은 애굽의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는 애굽의 현란한 불빛에 미혹당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입니다. 27절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가 당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히 그와 맞서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마치 지금 내 앞에 계시는 것처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무서워합니까? 왜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왜 우리가 마귀를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처럼 그 하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처럼 의식하며 살면 우리도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상대적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왕들이 나를 위협하고 대적한다 해도 내가 하나님을 확실히 바라보는 한, 절대 비겁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기에 항상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마귀가 아무리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위협해도 내 앞에는 가장 강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마귀는 도깨비처럼 사라집니다. 우리가 애굽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무서워하는 것은 다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능히 물리치고도 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홍해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은 지금 당황해서 울부짖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흔들리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모세는 그 위기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위협적인 검푸른 홍해와 뒤쫓아 오는 바로의 전차 군대를 보았기에 난리를 쳤는데, 모세는 그 와중에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처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바라봐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우리 앞의 홍해가 쩍 갈라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바로의 군대는 몽땅 홍해에 수장되는 통쾌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어린 양의 피를 믿은 사람입니다. 28절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장자 재앙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를 잃지 않습니다. 이 장자 재앙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로 출애굽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스라엘 가정은 장자를 잃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미리 내려주신 처방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피 뿌리는 예식입니다. 흠 없는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라. 그리하면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의 피를 보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유월절 예식입니다. 그런데 당시 모세가 하나님이 일러주신 처방을 백성에게 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마 하나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떤 이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고 죽을 사람이 안 죽고, 안 바른다고 산 사람이 죽을까? 다 허황된 얘기라면서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집의 장자는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반신반의하면서 혹시나 싶어 모세가 일러 준대로 이행한 집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밤새 떨었을 집도 있었을 겁니다. 그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신반의하며 피를 발랐으나 그 집 장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피는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이스라엘 가정들은 모세가 일러준 그대로 단순히 믿고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편안히 잤습니다. 당연히 그런 집은 장자가 안 죽었습니다. 만약 그 정보를 애굽 사람이 사전에 듣고 애굽 사람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발랐으면 그 집의 장자는 당연히 살았습니다. 문제는 피를 발랐느냐 바르지 않았느냐 입니다. 그 정보를 몰래 훔쳐서 발랐든, 발라놓고 밤새 불안에 떨었든, 무조건 문설주에 피를 바른 가정의 장자는 살았습니다. 이게 피 뿌리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처방을 알려주셨을 때 모세는 확신했습니다. 이 처방대로 하면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보를 몰랐던 애굽 가정의 장자는 다 죽어 나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를 발랐느냐 안 발랐느냐 입니다. 그 집안의 장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모세는 유월절 예식을 제정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실행하게 했고, 장자들을 다 구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피 뿌리는 예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를 우리 가정의 문설주에 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험이 없습니다. 주님의 객관적인 피 흘림이 주관적으로 효험이 있기 위해서는 그 어린 양의 피를 내 집 문설주에 발라야 합니다. 피 흘림과 피 뿌림은 엄연히 구분됩니다. 그래서 피 뿌림의 예식이라고 했습니다. 피 뿌림의 예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난주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피 흘림과 유월절 피 뿌림의 예식을 생각하시며 주님의 보혈을 깊이 감사하십시다. 우리는 일찍이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계시된 주님의 피 뿌림을 통해 우리 가정이 다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0nsZ-7Ahq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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