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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엘리바스(욥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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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2031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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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엘리바스 </p>
<!-- paragraph:p0003 -->
<p class="p1">욥 4:1-7</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사실 욥은 사업이 망하고 자녀들이 죽음을 당하고 자기 몸에 닥친 가혹한 질병 때문에 무너졌다기 보다 친구들의 공격 때문에 절망의 맨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사람입니다. 사탄이 욥의 재물을 빼앗고 가족들을 빼앗고 건강을 빼앗고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결국 그의 친구들을 통해 이룬 것입니다. 세 친구가 교대로 욥과 변론하며 욥의 모든 고난이 죄에 대한 형벌임을 주장하는데 욥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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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책망</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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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엘리바스는 세 친구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듯 한데 욥에 대해서도 다른 이에 비하면 다소 동정적이었습니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 욥에게 말을 건네며 자기가 조금 아픈 충고를 하더라도 끝까지 참고 들어 줄 것을 당부합니다. &lt;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gt;(2절). 엘리바스는 &lt;전에는 남을 가르치던 네가 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 남에게는 잘도 처방을 내리던 네가 왜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위선이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는 쓰러지면 안 된다고 가르치던 네가 왜 스스로 정신줄을 놓으려 하느냐? 의원이여, 네 자신부터 고치라!&gt;는 식의 책망부터 쏟아냈습니다. &lt;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gt;(5절). 그리고는 아주 냉정하게 욥의 신앙고백을 비웃습니다. &lt;겨우 이것이 네 경외함, 네 자랑, 네 소망, 네 온전함이었더냐&gt;(6절). 따라서 이제 네 모든 것이 가식이고 위선이었음이 드러났다며, 욥의 신앙이 진실했다면 절대 하나님이 너로 하여금 이런 환난을 겪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라며 장담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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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0 -->
<p class="p1">자백</p>
<!-- paragraph:p0011 -->
<p class="p1">엘리바스는 욥이 위선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아주 그럴 듯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유사이래 선한 자는 결코 파멸한 예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제껏 듣고 보고 읽은 것 중에 죄 없고 의로운 자가 너처럼 쫄딱 망한 경우가 단 한 건이라도 있었다면 어디 내게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이런 논리는 결코 온당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의인도 얼마든지 망하고 환난을 당합니다(사 57:1). 아픔이나 고통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전 9:2). 의인 아벨은 죄 없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과 악인 간의 확실한 차이는 죽음 이후에나 드러납니다. 이렇듯 엘리바스는 몸으로는 욥 곁에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욥을 진심으로 위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신학적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상처 입은 사람의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을 훈계하고 꾸짖으며 허물을 자백 받기 위함보다 위로하며 격려하며 같이 아파해야 합니다.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보다 함께 그 고통을 당해줘야 합니다. </p>
<!-- paragraph:p0012 -->
<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멸망</p>
<!-- paragraph:p0014 -->
<p class="p1">&lt;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gt;(8-9절). </p>
<!-- paragraph:p0015 -->
<p class="p1">엘리바스의 논리가 점점 더 적나라해집니다. &lt;내가 그동안 무수히 봐 온 바에 의하면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했다&gt;는 것입니다. 그간 네가 그 어떤 신앙고백을 해왔든지 간에 죄를 밭 갈고 악을 심어 왔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의 적대자 노릇을 했습니다. 욥을 위로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했습니다. 그는 욥을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잔인하게 정죄하므로 더 주저앉게 했습니다. 욥을 비난하고 단죄하며 욥이 흉악한 죄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고자 심문했습니다. 위로와 격려는커녕 괴로움만 더 할 뿐이었습니다. 사탄도 정죄하는 영입니다(왕상 22:22). 상처 입은 친구를 찾아가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만은 절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잔인한 짓입니다. 친구에게 당하는 아픔은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