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욥 3: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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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6
고통
욥 3:20-26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20절).
욥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처럼 비참한 자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며 항의하고 있습니다. 가끔 중환자의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례가 언론에 보도됩니다.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삶을 연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만 연장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보면 욥의 호소야말로 인류 최초로 제기한 존엄사 문제같기도 합니다.
죽기를 구해도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21절).
보십시오. 아무리 죽음을 갈망해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이미 자살은 <죄>라는 믿음이 일반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됐을 테니까요. 아무리 원해도 죽음이 오지 않고 그렇다고 자살을 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생명이란 절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내 목숨, 내 생명>이란 착각일 뿐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의 엄숙한 증거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죽기를 구해도>, 또 아무리 <살기를 원해도> 결코 내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음식 앞에서도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24절).
욥은 지금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퍼서 식욕조차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환자라 해도 어떤 식으로든 먹어야 기운을 차리고 병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오직 탄식과 한숨과 신음만 물처럼 흘러나올 뿐 식욕은 터럭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고백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25절). 자신이 평소 두려워하고 무서워한 것이 내 몸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욥이 늘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고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특히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부분을 치고 들어옵니다. 건강을 두려워하면 건강으로, 돈을 두려워하면 돈으로, 명예를 두려워하면 명예로 시험합니다. 그 부분이 내게서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두려움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십시오.
평온도 휴식도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6절).
욥은 지금 최악의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허무의 심연에도 떨어졌습니다. <평온도 없고 … 다만 불안만> 있다는 토로는 그가 지금 극도의 우울증에 빠졌음을 뜻합니다. 전에는 두려웠는데 지금은 불안하다는 겁니다. <두려움>에는 가족, 건강, 재산, 명예 같은 뚜렷한 물리적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상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불안>에는 가시적 대상이 없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허무의 위협이요 유혹입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이를 <존재론적 개념>이라 명명했습니다. 어거스틴도 불안이란 <절대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원초적인 귀소본능이므로 참 존재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극복되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고백록 1권 1장). 틸리히의 규정대로 허무와 존재의 <경계선상의 존재>인 실존, 부디 주님의 품에 전적으로 귀의하십시오. 그것만이 끝없는 허무의 나락으로부터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