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죽고 싶은 마음뿐(욥 3:1-11)

20120310 

죽고 싶은 마음뿐 

욥 3:1-11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라도 낙심할 수 있고, 또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도 합니다. 욥도 계속되는 고통에 지쳐 결국은 그런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죽음으로써 그 고통에서 놓여나기를 소망했는데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보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욕구를 상실한 것입니다. 극심한 우울증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1절).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3절).

욥이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슬픔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자신의 출생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낙심이란 아무리 강한 사람, 아무리 경건한 신자라 해도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현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낙심한 자의 최악의 고뇌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우울, 분노, 근심, 원한, 혼란, 냉소, 두려움, 무기력, 불면증, 슬픔 등. 바울도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는 고백까지 했고, 마르틴 루터도 깊은 우울증에 빠져 <나는 일주일 이상 죽음과 지옥의 문턱 가까이 가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절망적인 심정과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러운 마음에 휘말렸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깊은 절망의 나락과 심연의 골짜기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어를 저주하듯 내 태어난 날을 저주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8절).

욥은 네 가지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어야 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심해 먹고 마실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이성적인 고난이 극심해 아무리 마음속으로 묻고 답을 구해도 혼란스럽기만 하고 황망할 뿐이었습니다. 정서적인 고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시도 그 마음이 쉴 수 없없고 영적인 고통 또한 최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신화적인 바다 괴물 리워야단(식인 악어)을 저주하듯 사람들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했겠습니까? 낙심과 우울증은 이토록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가야할 마땅한 길을 잃어버리게도 하고 또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한 채 잘못된 결론에 성급하게 도달하게도 합니다.


사산아로 태어났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11절).

욥은 자기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다 여기서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이보다는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배은망덕하고 외람되게도 욥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증오하고 자기를 사산아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차라리 태에서 죽어 이 세상의 고통과 험한 꼴을 겪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치명적인 모독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욥은 지금 삶이 자신에게는 최악의 저주고, 무덤이 가장 부러운 축복이라며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욥에게 심정적인 무한 연민을 느끼면서도 가장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