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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1월 9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전서 강해 35<br>본문: 고전 14:1-19</p>
<!-- paragraph:p0002 -->
<p>[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br>[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br>[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br>[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br>[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br>[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br>[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br>[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br>[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br>[10]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br>[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br>[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br>[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br>[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br>[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br>[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br>[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br>[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br>[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p>
<!-- paragraph:p0003 -->
<p>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인데, 이것은 13장 13절로 끝났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로 존재하려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세 가지 곧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소망으로 천국가고 사랑으로 영원히 삽니다. 기독교는 이 세 기둥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진리의 세 근본요소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13장이 끝났습니다. 왜 사랑이 중요합니까? 믿음도 소망도 한시적인데 반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절대적인 은사입니다. </p>
<!-- paragraph:p0004 -->
<p>14장도 역시 은사장입니다. 은사장은 12장부터 시작했습니다. 12장의 내용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입니다. 13장은 사랑의 은사가 집중적으로 다뤄집니다.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은사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두 은사를 대비시키며 그  본질을 논합니다. 왜 12장에서 이미 다룬 은사를 14장에서 다시 다룰까요? 방언의 은사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가장 선호했던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의 은사 때문에 많은 물의를 빚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바울이 가장 선호한 은사였습니다. 바울이 판단할 때 예언의 은사가 은사의 본래적 취지와 목적에 가장 부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언의 은사를 가장 사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교회에 가장 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4장에서는 한 장을 할애하여 고린도 교회가 가장 선호했던 방언의 은사와 바울이 가장 좋게 보았던 예언의 은사를 비교합니다. </p>
<!-- paragraph:p0005 -->
<p>14장 1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씀은 이미 제가 설명한 바대로 어떤 은사든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떠나면 그것이 어떤 은사든 그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은사를 모든 은사의 전제로서 다시 한 번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의 은사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은사의 본래 취지에서 어긋나기 쉽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데 그 은사를 사용하기가 쉽습니다. 은사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랑의 은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은사생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받은 은사를 과시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사랑이 깔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지금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장의 특성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입니다.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주장이 그들을 다치게 할까봐 조심하는데, 14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문제점을 들춥니다. “신령한 것”은 은사입니다. 1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 앞에 생략된 말은 ‘방언의 은사보다’라는 말입니다. 이토록 바울의 말은 노골적입니다. 그 이유는 2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사람은 방언을 알아들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혼에 덕이 될 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교회가 하던 방언은 외국어 방언(사람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말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는 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자기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4절). 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합니다. 방언은 예언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방언하려면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실제 방언이 통역되는 예가 드뭅니다. 대개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이 하나님과 비밀의 대화를 하기에 영적인 충족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방언하는 사람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본인에게는 유익하지만 다른 사람, 공동체에는 덕이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보다 방언이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예를 들고 있는데,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라고 합니다. ‘저’는 피리입니다. 소리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피리나 거문고를 분별하지 못하듯이 방언도 통역없으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런 방언은 13장 1절의 말씀처럼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애쓰라고 하면서(12절),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13절). 우리는 영으로도 기도하지만 마음으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바울 자신도 방언을 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방언보다는 예언이라는 겁니다. 방언이 통역되면 자기 영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도 유익하며, 교회에도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바울은 19절에서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깨달은 마음’는 이성입니다.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이 방언 일만 마디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끝까지 은사의 본질과 목적, 취지를 놓치지 않고 고린도 교회에 교훈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은사의 잣대는 바울처럼 공동체의 덕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입니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보다는 깨달은 마음 곧 이성으로 기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교회에서보다는 집에서 혼자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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