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304m: 스티그마(갈 6:17)

2012년 3월 4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둘째주일

본문: 갈 6:17

제목: 스티그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것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이란 말이 헬라말로 스티그마입니다. 흔적이란 말은 원래 쇠인장을 불에 달궈 자기 소유의 짐승에게 찍는 화인을 말합니다. 고대 헬라문화권이나 로마문화권에서는 동물뿐 아니라 노예나 포로,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파렴치범의 이마나 어깨에 스티그마를 찍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자기 몸에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졌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성서주석가들 가운데는 바울이 아마 실제 <예수> 라고 새긴 화인을 찍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중세 수도사 가운데는 실제 그렇게 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상습 성범죄자들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데 이것도 현대화된 스티그마입니다. 사회학이나 경제학, 심리학 쪽에서 스티그마 현상이나 효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 번 낙인찍히면 평생 거기에서 헤어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전과가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나라가 문민정부 아래서 IMF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국제사회나 글로벌 시장에서 아직도 IMF가 우리에게 준 부정적인 스티그마 효과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지만 여차하면 달아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 시장의 한계입니다. 


스티그마는 자기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찍는 낙관입니다. 그림이나 글씨도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낙인을 보고 박수근의 그림, 천경자의 그림인 줄 압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짐승의 표는 666입니다. 마귀가 자기 백성들 이마에 666을 찍는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이마에 666이라는 스티그마가 찍힌 사람은 사탄의 소유입니다. 왜 6이 아니라 666입니까? 마귀도 하나님처럼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마귀, 적그리스도가 사탄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6이 아니라 666이 찍힙니다. 하나님은 777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있으나 둘로 구분됩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나 하나님이나 마귀가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666,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777이 찍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666은 마귀가 관리하고, 777은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스티그마는 일차적으로 소유를 뜻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졌다는 것은 ‘나는 예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티그마는 쇠인장 화인이기에 한 번 찍으면 영원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녔노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티그마는 소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천사들이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인을 찍는데 그 숫자가 14만 4천 명입니다. 전에 박태선 전도관에서 사람들을 미혹할 때 14만 4천이 차기 전에 빨리 신앙촌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전에 들어가기 위해 재산 정리해서 거기 들어간 사람들 많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이단들은 14만 4천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여호와 증인,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안상홍 증인회, 신천지 등이 14만 4천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수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 그리고 이방의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입니다. 12 x 12 x 1,000이 14만 4천입니다. 문자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14만 4천명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 몸에 하나님의 스티그마를 가졌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스티그마를 지녔다는 말은 내가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의 흔적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웠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말은 십자가의 흔적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전기를 보면,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가 고행하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몸에 엄청난 뜨거움과 고통이 임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 자기 손발에 성흔이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고난의 신비체험이 성흔입니다. 주님처럼 양손과 발목에 엄청난 고통과 핏자국이 나타나는 체험입니다. 프랜시스는 그 체험 후에 자기가 주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를 보면 유명한 최후심판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최후심판 때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회자처럼 직업 종교인일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 면전이니 거짓말이나 과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을 겁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주님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수 천 수 만이 모이는 기도원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환자를 고쳤는데, 불법을 행했다니요? 왜 불법입니까? 왜 주님이 그 위대한 종들을 모른다고 하셨습니까? 그들은 모두 그 큰 일들을 통해 영광만 받다 왔다는 겁니다. 그들의 몸 어디에도 고난의 흔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누구도 자기 몸에 고난의 십자가를 진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호의호식하다가 왔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경고이자 예언입니다. 반드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주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어떤 선고를 받을 것인가? 이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서 스티그마가 없으면, 고난의 흔적이 없으면 그것은 다 불법이고 가짜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십자가의 흔적, 고난의 흔적인데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 노릇하며 호의호식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고난의 흔적이 없었기에 결국 ‘내게서 떠나라’는 주님의 준엄한 심판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참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수도 없이 매 맞고, 돌에 맞고, 항해하다 파선을 당하고, 강도에게 이방인에게 온갖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아마 사방에 깊은 상처와 흉터가 남았을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주님을 위해 감수한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주님의 제자입니다. 고난의 흔적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도 다 불법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에서 위대한 목사로 목회해도 다 불법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괜히 마지막 심판 때 왜 나를 모르느냐며 주님께 대들지 말고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사십시오. 요리조리 고난을 피해가는 것만이 절대 능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행운이나 복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통탄스러운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질색합니다. 십자가만 보면 달아납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도망갑니다.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다 달아납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출세작인 <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계속 사람을 해치는 식인상어를 잡기 위해 해안경비대장, 선장, 해양학자 세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로 갑니다. 긴 시간 무료하니까 배에서 술을 마시며 과거 상어잡이 무용담을 나누다가 나중엔 서로 상처를 내보입니다. 그런데 해안경비대장은 해안경비만 섰지 바다에 나가 상어를 잡아본 적이 없기에 상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난감해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며 산 적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그 부끄러움 그 민망함을 어찌하시렵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 마지막 대목을 기억하십니까? 천신만고 끝에 그 자리까지 왔으니 얼마나 몸에 상처가 많겠습니까. 기독도는 ‘나의 이 모든 상처를 주님 앞에 훈장처럼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이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영양 좋은 얼굴로 아무 상처 없이 깔끔한 몸으로 주님 앞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의 흔적을 사색하시며 남은 생애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복된 성도들 되십시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aeTABHvGg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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