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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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전서 강해 34
본문: 고전 13:8-13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지난 주에도 우리는 6절과 7절에서 사랑의 특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랑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은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합니다.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다 폐기됩니다. 여기서 떨어지다는 말은 헬라말로 ‘펙토’입니다. 이파리가 시들다, 무대에서 연기하던 배우가 사라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배우가 열심히 무대에서 연기하다 갑자기 사라지듯 사랑은 그렇게 실종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사랑은 당연히 시들고 떨어집니다. 부부사랑도 3개월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는 그렇지 않습니다. ‘펙토’라는 말은 인간적인 사랑의 허무함, 육체적인 사랑의 한계를 너무도 잘 표현한 말입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눈에 모으던 사람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세상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랑과 다른 은사를 비교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사도 바울 자신이 가장 선호하던 은사입니다. 바울의 은사목록에는 예언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요즘의 말로하면 예언은 말씀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첫째로 꼽았습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가 선호하던 은사요, 지식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도 선호하던 은사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희랍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식을 좋아했습니다. 지식인 성도들이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문제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문제, 우상의 제물 문제 말입니다. 어쨌든 바울이 세 가지 은사를 들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폐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성취되면 예언의 은사는 거기에서 끝납니다. 예언의 은사는 시한부 은사입니다. 모든 예언이 성취된 천국에서는 예언의 은사가 필요없습니다. 천국에는 말씀의 은사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성취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예언자도 설교자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소통을 위해 필요합니다.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 사람의 방언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천사의 말이 필요합니다. 오순절 때의 외국어 방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천사의 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든 하나님과 사람사이든 더 이상 소통의 장애가 없습니다.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이 땅에 있을 동안만 한시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언도, 방언도 폐한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모르는 것에 대한 정보, 앎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비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개방되고 드러나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강렬한 빛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새삼스럽게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모든 지식이 완성된 세계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도 여전히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예언, 방언,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9절 이하에서 바울은 사랑의 완전성을 역설합니다. 지식이나 예언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바로 천국의 도래입니다. 바울은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완벽히 관철되고 지배하는 세계인 천국이 도래하면 부분적인 모든 것은 다 폐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을 대비시킵니다. 다른 것은 다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미숙한데 사랑은 장성한 사람처럼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를 많이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미숙한 어린아이 같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인격적인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도 거울을 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으로써 사랑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바울시대의 거울은 지금 거울과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유리거울이어서 선명도가 뛰어나지만, 당시의 거울은 동거울이나 대리석 같은 것이 거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윤곽정도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마치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과 같으나, 사랑을 갖고서 하나님을 보면 마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입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인격이란 원래 그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가장 많이 개방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없거나 미워하거나 적대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를 닫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장해제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은사를 충만하게 가질 때 그야말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고 싶으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에 관한 가장 참된 지식을 얻고 싶으시면 지식의 은사보다 사랑의 은사를 더해야 합니다. 지식은 거울로 얼굴을 보지만, 사랑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주님을 온전히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충일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하나님의 상을 확실하게 보고 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마치면서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의 어휘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13절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의 진리의 주축이 되는 3대 어휘입니다. 바울은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나 소망은 8절처럼 다 시한부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믿음이나 소망은 예언처럼 지식처럼 다 폐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헬라말로 ‘사랑’이란 말은 여러 어휘가 있습니다. 아가페와 대비되는 사랑은 ‘에로스’입니다.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고린도에는 비너스 곧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에로스였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에게는 육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에로스에 전적으로 지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현대의 비극입니다. 에로스가 사랑의 전부라는 것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그 다음으로 ‘필레오 혹은 필리아’입니다. 자기 기호에 맞는 대상을 선택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필리아의 대상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고, 학문이나 예술, 나라 등일 수 있습니다. 철학 곧 ‘필로소피’는 학문 사랑입니다. ‘필로로지’는 언어 사랑이고, ‘필라델피아’는 이웃 사랑입니다. ‘필하모니’는 음악 사랑입니다. 그 다음으로 ‘스톨게’입니다. 혈육사랑입니다. 동포애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도 세속적인 사랑입니다. 이것도 조건반사적인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당연히 아가페입니다. 영원하고 초월적인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조건반사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 만한 근거가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페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산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로지 희생적인, 헌신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 무조건 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이 말씀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에로스든 필리아든 스톨게든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은사가 사랑의 은사의 세례를 받아야 하듯이 인간적 사랑, 세속적 사랑, 육체적 사랑도 아가페의 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값지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4장 1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학문도 예술도, 인간적인 사랑, 가족 사랑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있기 위해서는 아가페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가페입니다. 성화도 결국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삶이 성화아니겠습니까. 사랑의 은사로 내가 얼마나 충만한가가 성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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