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9m: 미쁘신 하나님(고전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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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9일 주일낮예배
본문: 고전 10:13
제목: 미쁘신 하나님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실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반드시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또 우리에게 시험을 당하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우리가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예수를 믿자마자 일이 다 잘 되는 집이 있습니다. 경사가 겹치고 돈도 잘 버는 그런 집 말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이런 일이 없더니 역시 교회가 다르긴 다르네 하면서 딸네 아들네 전화해서 교회가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왔는데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에 며느리에게 네가 이 집안에 와서 종교를 바꾸더니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윽박지릅니다. 당장 종교 바꾸자고 합니다. 사실 예수 믿는 가장 큰 이유는 환난과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기대로 막상 믿어보면 물론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평안보다는 시련이 더 많습니다. 왜 평안하자고 예수를 믿는데 막상 믿어보면 고난이 더 많을까요? 일단 신자가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운명에 개입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 이하입니다.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살고 경건하게 삽니까?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게 산다해도 그게 하나님 성에 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보면 시련이고 환난이나 하나님 쪽에서 보면 그게 은혜고 복이며 사랑입니다. 믿는 자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난과 시험의 신비를 바르게 깨달아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시련의 비밀을 바르게 깨달을 때만 정말 감사할 수 있고, 바울처럼 환난이 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 믿는다고 고난과 시험을 면제해 준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환난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만사형통과 무사함을 바라지만 신앙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평안할 때가 문제입니다.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누구나 일 잘 되고 평안하면 주님 찾을 일 없습니다. 여러분만 해도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건강하고 돈 잘 벌면 예수 안 찾습니다. 다 실패하고 망하고 외로울 때 믿게 됩니다. 그런데도 시련이나 환난이 불행입니까? 오직 만사형통만이 복입니까? 지금 여기에도 그동안 별 일 없었다면 아직도 여기에 안 계실 분도 있을 겁니다. 심지어 죽을 병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 고통이나 아픔도 없이 평안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기를 바랍니다. 그게 복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좋을 만큼 여러분은 평소에 경건하게 사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주님 앞에서도 떳떳하고 부끄럼 없이 심판대 앞에 설만큼 제대로 살고 계십니까? 그래서 병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꿈에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치명적인 불행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전혀 대비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죽어서 눈을 떴더니 주님 앞일 때의 좌절감과 절망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음은 절대 갑자기 맞으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 몸에 박힌 가시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학자들의 주장대로 그게 간질병이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 잘 하고 강단 내려가다 쓰러져 거품 내면 그게 교회에 덕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몸에 박힌 가시를 낳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기 위해 베푸신 복이라고 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겁니다. 저주의 가시가 아니라 은혜라는 겁니다. 그때부터 바울이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며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약함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악마의 저주가 아니라 치명적 치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임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세상에 약함과 자기 병을 자랑하는 건 바울뿐입니다.
절대 예수 믿는다고 고난과 시련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고난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아니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복을 내려주면 금방 기고만장해집니다.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주면 그때부터 제대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언제 기도다운 기도, 예배다운 예배를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편안하고 일이 잘 풀릴 때요? 아닙니다. 시련이 닥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제대로 기도합니다. 편안할 때 기도하는 것은 다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 적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시험에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없는 사생자들에겐 매가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차피 죽으면 영원한 고통에 처해지기에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낙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공평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에겐 하나님이 엄한 아버지이시기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꾸중하고 매도 드시고 벌도 세웁니다. 그러나 실은 이게 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요 관심이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뻐해주는 것만 사랑입니까? 때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사랑으로 키우고 자식을 때려 키운 저는 미움으로 키웠습니까? 자식을 미워서 때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잘 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은 내가 매를 들고 때릴 이유가 없습니다. 내 자식이니까 때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간섭하고 매를 드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환난이 절대 불행이 아니라 복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따라서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적어도 그런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요즘은 안 그런다고 하던데, 전에는 군에서 사병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쉬게 하지 않았고 긴장을 풀게 하지 않았습니다. 긴장을 풀면 꼭 사고를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막다른 지점까지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지 절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시험을 이기면 승진, 진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저 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검증도 안 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 평가해 보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극복하고 통과하면 검증되었다고 하십니다.
작년 1월에 세상을 떠난 박완서 작가 아시지요? 그분은 지난 1988년에 남편을 암으로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남편이 돌아가시고 석 달 만에 27살 난 막내 아들을 잃었습니다. 서울 의대를 나와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위로 딸이 넷이 더 있습니다. 셋은 서울대, 하나는 이대에 보냈습니다. 늦둥이 아들을 잃고 너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자기도 남편을 따라가겠노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포악을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쓴 일기가 편집되어 나왔는데 <한 말씀만 하소서> 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지은 죄가 뭐길래 남편 데려가고 아들까지 데려가느냐고 했습니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기도시간에 산책을 하면서도 내가 하나님께 묻던 질문은 딱 한 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 했길래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포악을 떨고 항거하던 이유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응답이 들려왔다. 소화가 안 되어 변기에 무릎을 꿇고 다 토해내고 나자, 계시처럼 내 죄가 떠올랐다. 나는 내 가족 외에 타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물론 악을 저지른 적은 없으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크나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이 태산 같은 고통을 주신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아직 자기의 능력이 통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은 정작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면 이미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우리를 편안하게 하시면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망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 달라서 고난의 정도가 다른 겁니다. 고난의 모양과 빛깔이 다른 겁니다. 우리 각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시험을 주십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사람 만들려고 그러는 겁니다. 불행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입니다. 감사하십시오.
그 시험 다음에 정말 아름다운 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너는 이만한 복을 누릴만한 그릇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세상살이에서도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면 급수가 올라가고 봉급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시험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엄살 부리지 말라는 겁니다. 지레 백기를 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충분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데 우리는 자기가 알아서 행복해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실패입니다. 시험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유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저작이 많습니다. 신약 2/3이 다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상과 생애, 사역을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바울이 우리에게는 위대한 선진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많은 글을 남겼습니까? 바울이 원래 저술가였습니까? 아닙니다. 글 쓰는 남다른 취미나 소질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글을 많이 쓴 이유는 한마디로 목회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성공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만, 바울은 철저히 실패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해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나 제대로 굴러가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교회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편지를 쓴 겁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십시오. 어느 것도 단순한 문안 편지가 아닙니다. 절박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한 지시와 당부의 편지입니다. 신약성경 2/3는 바울이 철저히 경험했던 환난의 산물입니다. 바울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신약성경 2/3가 없을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환난과 시험을 하나님이 어떻게 요리하셔서 어떤 선을 연출하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비록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는 상처투성이의 모습일지라도 우리의 모습에 좌절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겪는 시험을 이기게 하시고, 피할 길을 내사 나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런 기대와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끝도 한도 없이 미쁘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가장 약할 때 바울처럼 오히려 강함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시련과 시험 중에 오히려 감사하시므로 그 불행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되길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과 신앙과 영성도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길 기원합니다.
설교영상보기: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mym2Qi0Lr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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