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907m: 추수 때까지 두라!(마 13:24-30, 36-43)

2008년 9월 7일 푸른교회 주일낮예배
본문: 마 13:24-30, 36-43
제목: 추수 때까지 두라!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여러분들은 그런 의문 생기지 않습니까?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왜 흉악한 악이 존재할까? 구약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도 일찍이 그런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께 답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선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신데, 왜 선하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횡행하며 죄악이 판을 친단 말입니까? 어째서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의인들은 날마다 고난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또 이런 세상을 왜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고 두고 보십니까? 저는 정말 분통이 터져 못살겠습니다. 그래서 이 하박국 선지자는 늘 이런 의문 때문에 누구보다 더 고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우리에게 보통 시험거리가 아닙니다. 나쁜 짓을 하면 당장에 벼락이 떨어지면 나쁜 짓 하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도 없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악당들이 하는 일이 더 잘 됩니다. 의로운 사람들의 일이 더 안 되고 고난만 당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을 겟세마네 동산에 와서 체포할 때 많은 이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 중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깨어기도하라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말씀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주님을 체포하러 오자 다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끝까지 남아있다가, 칼을 뽑아 그 말고의 귀를 내리칩니다. 주님은 그 와중에도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고 하시며 그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말고는 당장에 감격해서 예수님의 편을 들었습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예수님을 체포해서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순이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추석이 몇일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추수에 관한 이야기, 알곡과 가라지에 관한 비유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농사꾼은 아니었습니다. 목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농사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그때는 농사짓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농사짓는 일로 비유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농부가 정성껏 땅을 고른 다음에 알곡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에는 몰랐는데 여기저기서 알곡과 비슷한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도 뿌리지도 않았는데, 선별해서 알곡만 뿌렸는데 어째서 가라지가 자랍니까? 논의 피, 보리밭의 깜부기가 더 잘 자랍니다. 종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가서 보고하기를, ‘가라지가 많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장에 뽑을까요?’ 그런데 주인의 말은 뜻밖에도 ‘가만 두어라. 둘 다 추수 때까지 가만 두라’고 합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는 불사르고, 곡식은 곳간에 들이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두 군데입니다. 37절 이하를 보면 제자들이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하자, 주님이 설명해 주십니다: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37-39). 40절 이하를 보면,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가라지의 최후 운명을 밝힌 말씀입니다. 세상 끝날에 가라지를 다 골라내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하십니다.

풀무불은 쇠를 녹이는 대장간의 불입니다. 여기에 가라지를 던져 넣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풀무불은 풀무불인데, 타지는 않고 영원한 풀무불의 고통만 느끼게 하는 불입니다. 그 불에 가라지를 던져 넣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가라지들의 비극적인 최후와는 달리 알곡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다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게 해서 해처럼 빛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43). 이처럼 알곡과 가라지의 운명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선 왜 주님의 밭에는 심지도 않은 가라지가 납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숫한 악이 존재합니까? 세상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 모순이 많고 황당한 일이 날마나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회의에 빠집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정말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가? 정말 하나님이 의로우신가?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도 이런 일이 백주에 일어날 수 있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고 매번 이 우주를 창조하시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주인은 최상의 씨앗만 고르고 골라 알곡만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뿌리지도 않은 가라지, 깜부기, 피가 납니까? 교회도 원래는 알곡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들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얼마든지 가라지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주님은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25, 27절을 보면 원수가 와서 덧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39절을 보니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알곡만 뿌린 밭에 자기의 아들들을 뿌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교회 안에 온갖 모순과 갈등과 부조리를 조장하게 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알곡을 심었듯이 마귀도 몰래 이 세상에 가라지를 부단히 뿌립니다. 자기의 세력을 확장해 가려고 합니다. 이제 왜 가라지 같은 못된 잡초와 독초가 생긴 줄 아시겠습니까? 다 원수 마귀의 작품입니다. 알곡들을 해치고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사탄이 공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라지들에 대한 주님의 처방을 다시 봅니다. 종들은 못된 가라지를 당장에 뽑아버리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추수 때까지입니다. 추수 때가 언제냐면 세상 끝날, 종말, 최후 심판의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당장에 낫을 대거나 뿌리 채 뽑아도 시원찮은데, 가만 두라고 하시고, 추수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늘 그러십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안 듭니다. ‘하나님이 어디있냐 내 주먹을 믿으라’며 망발을 하는 인간을 일단 가만 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은 햇빛, 신선한 바람을 주십니다. 올해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추석을 맞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더 잘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어차피 저들은 후일에 풀무불에 들어갈 사람들이니 너무 배아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들의 최후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이런 말로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주인이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두라고 하신 것은 가라지에 대한 배려나 선심 때문이 아니라, 실은 알곡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인들 왜 당장 저 가라지를 뽑아버리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뽑아 봐야 알곡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는 알곡보다 더 깊고 넓게 퍼져있어서 가라지 한 포기 뽑다가 알곡 여러 포기 다칩니다. 그래서 자제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참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가라지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알곡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순에 찬 세상을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도움을 위해 주님이 참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더러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참으라는 겁니다. 주님이 가라지에 대한 심판을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상 악이 득세한다 해도 억울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 날까지, 추수 때까지는 같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요 작전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또 마귀의 자식들과 함께, 긴장, 모순 부조리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낙관은 금물입니다. 교회에도 사회에도 내 심령 안에도 항상 가라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십시오. 항상 모순은 있고, 아픔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귀의 장난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25절을 보니,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시간이 사람들이 잘 때입니다. 사람들이 다 잘 때 마귀가 우리 사회에 악을 뿌리고, 성도들이 다 잘 때 마귀가 교회에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내가 졸 때 내 심령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졸거나 자면 무방비로 마귀에게 당하고 맙니다. 마귀는 야행성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잘 때 활동합니다. 우리가 자면 내 영혼을 잃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면 마귀가 우리 교회에 들어와 마음껏 유린합니다. 마귀는 절도나 강도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대담하며 잔인합니다. 한시도 기도하지 않으면 내 영혼과 정신에 가라지를 사정없이 뿌립니다. 그래서 병들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며 결코 해코지 하지 못합니다.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다. 마귀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입니까? 믿는 자를 넘어뜨리는 겁니다. 41절을 보니 마귀는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알곡들을 가라지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곡들을 넘어뜨립니다. 시험에 빠지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회의에 빠지게 합니다. 절대 우리가 가라지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라지 얘기가 나오면 자기가 혹 가라지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지금은 알곡이지만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나중에 가리지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만, 알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곡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알곡을 치명적으로 상처입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귀를 경계해야 합니다. 마귀가 나를 해치지 못하도록,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내가 알곡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하거나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혹 내가 졸 때 마귀가 내 안에 가라지를 뿌리고 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부단히 단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는 존재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알곡이라는 사실, 마귀에게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생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주 안에서 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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