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129m: 믿음과 성품(행 15:36-41)

2012년 1월 29일 주일낮예배/여전도회 주일

본문: 행 15:36-41

제목: 믿음과 성품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저는 여러분이 제 설교를 그토록 관심 있게 들으시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어떤 주제를 설교해도 그러려니 할 줄 알았지, 조목조목 따져가며 꼼꼼하게 들으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지난 주 설교 얘기인데, 물론 우리 교회 성도가 그런 멜을 보낸 게 아닐 겁니다. 설교에 그런 반향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13통의 멜이 왔는데, 내용이 다 왜 설교를 하다가 말았느냐, 왜 문제제기만 하느냐, 결론이 뭐냐, 어쩌라는 거냐? 거였습니다. 사실 설교를 하다가 이후 순서를 생각해 서둘러 설교를 마쳤는데, 친절하게도 그렇게 많은 분이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결론은 그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75세 때 부름받고 구원받고 복을 받았는데, 신앙고백은 그로부터 10년 후엔 85세 때 했다는 겁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부름 받았는데, 15장에 가서야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고백 후 30년이 지난 115세 때 그의 신앙이 시험을 통과해 인정받았다는 겁니다. 율법이나 할례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율법을 잘 지켜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99세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나 처음부터 잘 믿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닙니다. 무조건 구원부터 받은 겁니다. 75세 때 구원받고 99세 때 할례를 받은 겁니다. 아브라함도 진도가 느렸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좌절하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 실망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설교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제는 성품, 기질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품이 마음에 드십니까? 늘 실망하지 않습니까? 모세의 성품을 보십시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합니다. 그런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요단강 건너에서 가나안 문턱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요단강을 죽음으로 비유하고 가나안을 천국으로 비유하는데, 그러면 모세는 천국 못 간 겁니까? 모세는 천국에 갔습니다.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 주님과 삼자 회담을 했습니다. 천국 못 간 사람이 불려나와 주님과 회담했을 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갔습니까? 소위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므리바 사건은 광야 므리바에서 물이 없다고 백성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백성을 다 모으고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명하라고 했습니다. 분부대로 모세는 백성을 모으고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명한 게 아니라 자기의 지팡이로 불같이 성질을 부리며 두 차례나 후려쳤습니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은 나왔지만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나의 영광을 욕되게 했다며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문턱에서 죽습니다. 세상에서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도 결정적 순간에 성질 한 번 잘못 부려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처음 예수 믿는 분들은 신앙생활하면 과연 자기의 성격이나 기질이 변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평소 자기 기질이나 성품에 불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거듭난다고 하니 자기의 성격도 좀 획기적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성적이던 사람이 외성적으로 변합니까? 소극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인 성격이 됩니까? 매사에 부정적이던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뀝니까? 소심하고 쫀쫀하던 사람이 대범하고 통 큰 사람이 됩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께 소개한 본문은 2000년 기독교사에 최초 이방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대판 싸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갈라섭니다. 원래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계시로 2인 1조 해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자기들 뜻에 따른 게 아니라 성령이 맺어주신 관계입니다.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 등을 집니다. 두 사람의 다툼에서 훨씬 더 흥분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나바는 그 전도여행에 자기 사촌인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왜냐면 1차 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리고 갔는데, 마가가 밤빌리아에서 되돌아갔기에 그런 사람을 전도여행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한 겁니다. 바나바는 한 번쯤 실수할 수 있지 않느냐며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바나바의 심성은 유명합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누구보다도 헌금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품도 좋았고, 사도들이 별명을 붙이기를 바나바, 곧 권위자라고 붙였습니다. 권하고 위로하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는 요즘 교회 직제로 보면 원조 권사입니다. 그런 사람인데 바울하고 싸우고 갈라섰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의 후견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바울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워낙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한 사람이었기에 위장 개종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을 소개하고 정말 회심하고 개종한 사람이라고 변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바나바와 싸우고 갈라 선 겁니다. 


바울의 성격은 대단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 이하에는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를 많은 이가 보는 앞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스데반을 죽일 때 그 일에 가담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 믿고도 자기 성격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를 믿은 사람이 없는데 그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대교에 있을 때나 회심 후 기독교도가 되었을 때나 그 성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나의 성품이 바뀌지 않습니까? 혹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며 비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의 고유한 정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순화는 될지 모릅니다. 급한 사람이 느긋해지지 않습니다. 예민한 사람이 둔감해지거나, 날카로운 사람이 무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변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얘깁니까? 성질이나 기질, 성품, 정서가 변한다는 게 아니라 신분이 바뀐다는 겁니다. 소속의 변화, 운명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마귀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전에는 내 배후에서 마귀가 나를 조종했으나 이제는 성령이 나를 강제하십니다. 신분이 바뀌었고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운명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질, 성격, 기질은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것들은 주님이 내게 주신 개성이요 복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바꿔야 할 필요를 못 느끼십니다. 다만 그 성격과 기질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에는 바울이 주님을 믿는 사람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 자기 성격이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자기 성질이 작동합니다. 똑같은 칼입니다. 전에는 사람을 해치는 흉기였으나 이제는 곪은 데를 째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의술의 소중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칼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칼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똑같은 돈입니다. 전에는 술 마시고 유흥하는 자해하는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자선하는 선한 도구가 되는 겁니다. 돈이 물리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그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이게 성화(聖化)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숙고하십시다. 자신에 대해 좀 더 관대하십시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만 용납할 뿐만 아니라 남의 성격과 기질도 존중하십시다. 눈이 오면 어떤 사람은 나가서 눈싸움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따뜻한 커피 마시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드 타러 가자고 합니다. 다 기호가 다릅니다. 다 나름대로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가 부를 때 꼿꼿이 앉아 있고, 어떤 이는 박수를 치며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속으로 하고, 어떤 이는 소리를 내어야 성에 찹니다. 정서가 다를 뿐입니다. 나와 다른 정서에 대해 좀 더 관대하십시다. 너는 내 정서가 아니야, 내 성격에 안 맞아 하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싸우고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시진 않습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을 포용하고 용납하며 더불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등 돌리고 사는 걸 바라시지 않습니다. 올해는 좀 더 자신에 대해 너그럽고 남에 대해서도 너그럽고 관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맞지 않다고 적대하면 결국 파국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렇게도 마가를 반대하고 자기의 은인인 바나바와 갈라서기까지 싸웠는데, 말년에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 저가 내게 유익한 사람이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만큼 성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와 다르지만 얼마든지 나와 함께 유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관대함과 여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서와 성품, 기질에 대해서도 좀 더 사랑하십시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조금씩 성화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감사하십시다. 나와 다른 남에 대해서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좀 더 용납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며 더불어 성화를 이루십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성령의 기대입니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GGQ-QJKZQ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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