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08m: 빛으로 소금으로(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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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8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5:13-16
제목: 빛으로 소금으로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올해 우리 교단총회(예장 통합)의 표어가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과 소금> 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총회 주제에 맞춰 <빛으로 소금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요즘은 다 아파트 생활을 하시니까 마당에 소금 뿌릴 일이 없습니다만, 전에는 부정한 사람이나 재수 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어른들이 ‘아무게야 마당에 소금뿌리라’고 했습니다. 예부터 부정을 물리치거나 액운을 물리칠 때 마치 가톨릭에서 성수를 뿌리듯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때는 성소 제단 곁에 반드시 소금을 두게 했습니다. 정결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계약을 맺을 때, 그러니까 땅이나 집 등을 매매할 때 소금을 두고 했습니다. 소금은 또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Salzburg) 아시지요? 독일 뮌헨에서는 잘쯔부르크가 멀지 않습니다. 약 160km 정도 됩니다. 요즘은 잘쯔부르크가 음악의 도시입니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고, 국립 음대가 있습니다. 중세풍의 건축양식이 아주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거기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때는 잘쯔부르크가 음악보다는 중요한 무역도시였습니다. 소금을 많이 생산한 도시입니다. 잘쯔(Salz)라는 말이 소금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시 외곽으로 가면 소금 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일염이지만, 거기는 산에서 캐낸 양질의 광염을 많이 생산했던 도시입니다. 옛날엔 냉장고가 없고, 다양한 조미료가 없었으니까 소금이 비쌌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셨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정결을 상징하고, 맛을 내는 비싼 소금이라는 겁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빛 없이 못 삽니다. 그런데 빛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귀했습니다. 유사 이래 태양신을 섬기지 않은 종족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태양 보고 소원을 빕니다. 일출 보려고 새벽같이 동해로 달려갑니다. 모든 민족이 빛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만큼 빛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구조를 보면 빛이 잘 들지 못합니다. 창이 하나만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룸입니다. 그래서 낮에도 집안에 들어가면 컴컴합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올리브유를 등잔 기름으로 썼습니다. 식용유를 쓴 겁니다. 그래서 빛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런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냐면, 세상은 이미 부패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두셨다는 겁니다. 어둡지 않은 세상에 왜 빛이 필요하며, 부패할 일 없는 세상에 왜 소금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연적으로 세상은 부패하고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탓할 필요 없으며, 세상이 너무 썩었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소금 역할을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하고,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기능,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흥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 건강하고 밝은 사회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소명을 방기하면 결국 그 사회는 망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악해서 망했습니까? 죄인들 때문에 망했습니까?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선고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서서 중보를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의인을 찾아보겠노라고 했습니다. 50명, 45명, 30명, 20명, 마지막 10명까지 내려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었기에 유황불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썩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어두워집니다. 문제는 빛과 소금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곧 의인들이 제 몫을 하느냐 입니다.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패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즘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 어떻습니까?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요즘 한국 기독교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질근질근 밟히는 꼴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공연히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이런 모욕,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게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못난 탓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맛을 잃으면 이렇게 밟힌다고 주님이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린 겁니다.
그렇다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맛을 내며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사방을 밝힐 수 있을까요? 반드시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녹이고, 태워야 합니다. 산화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해체해야 합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연소시키지 않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기름이든 양초든 횃불이든 다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심지어 저 하늘의 태양도 열심히 자기를 태우면서 열과 빛을 냅니다. 태양은 고체가 아닙니다. 90% 이상이 수소입니다. 그 수소가 핵융합을 통해 열과 빛을 내면서 자기를 소모하고 있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희생을 거부하면 절대 소금되고 빛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양보하고 해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습니다. 익명의 신자로 삽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만 신자로 삽니다. 시침을 떼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삽니다. 소금과 빛을 거부하면서 삽니다. 왜 그럴까요? 희생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인데 십자가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왜 너도 나도 큰 교회로 몰려갈까요? 우리 교회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작고 구차한 지하교회에 여러분이 이렇게 꾸준히 나오신다는 게 너무도 존경스럽습니다. 요즘 지하교회에 다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왜 다들 큰 교회로 갈까요? 희생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신을 녹이거나 태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아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특별하고도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희생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보장하기에 쾌적한 교회로 갑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녹이는 소금이 되라, 자신을 태우는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지금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너무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밟히고 개독교가 된 겁니다. 완전히 짠 맛을 잃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를 냅니다. 독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이게 지금 한국 교회의 꼴입니다. 바닷물은 염분이 3%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은 12-15%가 신자입니다. 바닷물은 불과 염분이 3%인데도 그렇게 싱싱하게 바닷물을 지켜내는데,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국에 15%가 되는데도 왜 이 사회가 썩고 어둡습니까?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짜라는 얘깁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주님이 어느 안식일 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인 장애인을 고치는 얘기가 나옵니다. 원래 안식일에는 의술도 노동이기에 사람을 고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안식일 날 그것도 회당에서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을 보면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꾀했다고 합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그 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죽을 각오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주님은 장애인 한 사람 고치는 일에도 당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결국은 그 사건이 발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비겁하고 안일합니다. 소금이며 빛인데 절대 자기를 해체하는 일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올해는 다시 한 번 대 사회적 책임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란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깁시다. 좀 더 희생을 각오하십시다. 정말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2012년 1월 8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5:13-16
제목: 빛으로 소금으로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올해 우리 교단총회(예장 통합)의 표어가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과 소금> 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총회 주제에 맞춰 <빛으로 소금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요즘은 다 아파트 생활을 하시니까 마당에 소금 뿌릴 일이 없습니다만, 전에는 부정한 사람이나 재수 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어른들이 ‘아무게야 마당에 소금뿌리라’고 했습니다. 예부터 부정을 물리치거나 액운을 물리칠 때 마치 가톨릭에서 성수를 뿌리듯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때는 성소 제단 곁에 반드시 소금을 두게 했습니다. 정결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계약을 맺을 때, 그러니까 땅이나 집 등을 매매할 때 소금을 두고 했습니다. 소금은 또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Salzburg) 아시지요? 독일 뮌헨에서는 잘쯔부르크가 멀지 않습니다. 약 160km 정도 됩니다. 요즘은 잘쯔부르크가 음악의 도시입니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고, 국립 음대가 있습니다. 중세풍의 건축양식이 아주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거기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때는 잘쯔부르크가 음악보다는 중요한 무역도시였습니다. 소금을 많이 생산한 도시입니다. 잘쯔(Salz)라는 말이 소금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시 외곽으로 가면 소금 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일염이지만, 거기는 산에서 캐낸 양질의 광염을 많이 생산했던 도시입니다. 옛날엔 냉장고가 없고, 다양한 조미료가 없었으니까 소금이 비쌌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셨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정결을 상징하고, 맛을 내는 비싼 소금이라는 겁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빛 없이 못 삽니다. 그런데 빛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귀했습니다. 유사 이래 태양신을 섬기지 않은 종족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태양 보고 소원을 빕니다. 일출 보려고 새벽같이 동해로 달려갑니다. 모든 민족이 빛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만큼 빛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구조를 보면 빛이 잘 들지 못합니다. 창이 하나만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룸입니다. 그래서 낮에도 집안에 들어가면 컴컴합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올리브유를 등잔 기름으로 썼습니다. 식용유를 쓴 겁니다. 그래서 빛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런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냐면, 세상은 이미 부패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두셨다는 겁니다. 어둡지 않은 세상에 왜 빛이 필요하며, 부패할 일 없는 세상에 왜 소금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연적으로 세상은 부패하고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탓할 필요 없으며, 세상이 너무 썩었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소금 역할을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하고,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기능,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흥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 건강하고 밝은 사회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소명을 방기하면 결국 그 사회는 망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악해서 망했습니까? 죄인들 때문에 망했습니까?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선고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서서 중보를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의인을 찾아보겠노라고 했습니다. 50명, 45명, 30명, 20명, 마지막 10명까지 내려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었기에 유황불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썩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어두워집니다. 문제는 빛과 소금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곧 의인들이 제 몫을 하느냐 입니다.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패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즘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 어떻습니까?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요즘 한국 기독교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질근질근 밟히는 꼴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공연히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이런 모욕,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게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못난 탓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맛을 잃으면 이렇게 밟힌다고 주님이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린 겁니다.
그렇다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맛을 내며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사방을 밝힐 수 있을까요? 반드시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녹이고, 태워야 합니다. 산화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해체해야 합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연소시키지 않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기름이든 양초든 횃불이든 다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심지어 저 하늘의 태양도 열심히 자기를 태우면서 열과 빛을 냅니다. 태양은 고체가 아닙니다. 90% 이상이 수소입니다. 그 수소가 핵융합을 통해 열과 빛을 내면서 자기를 소모하고 있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희생을 거부하면 절대 소금되고 빛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양보하고 해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습니다. 익명의 신자로 삽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만 신자로 삽니다. 시침을 떼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삽니다. 소금과 빛을 거부하면서 삽니다. 왜 그럴까요? 희생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인데 십자가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왜 너도 나도 큰 교회로 몰려갈까요? 우리 교회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작고 구차한 지하교회에 여러분이 이렇게 꾸준히 나오신다는 게 너무도 존경스럽습니다. 요즘 지하교회에 다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왜 다들 큰 교회로 갈까요? 희생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신을 녹이거나 태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아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특별하고도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희생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보장하기에 쾌적한 교회로 갑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녹이는 소금이 되라, 자신을 태우는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지금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너무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밟히고 개독교가 된 겁니다. 완전히 짠 맛을 잃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를 냅니다. 독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이게 지금 한국 교회의 꼴입니다. 바닷물은 염분이 3%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은 12-15%가 신자입니다. 바닷물은 불과 염분이 3%인데도 그렇게 싱싱하게 바닷물을 지켜내는데,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국에 15%가 되는데도 왜 이 사회가 썩고 어둡습니까?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짜라는 얘깁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주님이 어느 안식일 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인 장애인을 고치는 얘기가 나옵니다. 원래 안식일에는 의술도 노동이기에 사람을 고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안식일 날 그것도 회당에서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을 보면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꾀했다고 합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그 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죽을 각오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주님은 장애인 한 사람 고치는 일에도 당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결국은 그 사건이 발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비겁하고 안일합니다. 소금이며 빛인데 절대 자기를 해체하는 일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올해는 다시 한 번 대 사회적 책임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란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깁시다. 좀 더 희생을 각오하십시다. 정말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2012년 1월 8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5:13-16
제목: 빛으로 소금으로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올해 우리 교단총회(예장 통합)의 표어가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과 소금> 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총회 주제에 맞춰 <빛으로 소금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요즘은 다 아파트 생활을 하시니까 마당에 소금 뿌릴 일이 없습니다만, 전에는 부정한 사람이나 재수 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어른들이 ‘아무게야 마당에 소금뿌리라’고 했습니다. 예부터 부정을 물리치거나 액운을 물리칠 때 마치 가톨릭에서 성수를 뿌리듯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때는 성소 제단 곁에 반드시 소금을 두게 했습니다. 정결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계약을 맺을 때, 그러니까 땅이나 집 등을 매매할 때 소금을 두고 했습니다. 소금은 또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Salzburg) 아시지요? 독일 뮌헨에서는 잘쯔부르크가 멀지 않습니다. 약 160km 정도 됩니다. 요즘은 잘쯔부르크가 음악의 도시입니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고, 국립 음대가 있습니다. 중세풍의 건축양식이 아주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거기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때는 잘쯔부르크가 음악보다는 중요한 무역도시였습니다. 소금을 많이 생산한 도시입니다. 잘쯔(Salz)라는 말이 소금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시 외곽으로 가면 소금 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일염이지만, 거기는 산에서 캐낸 양질의 광염을 많이 생산했던 도시입니다. 옛날엔 냉장고가 없고, 다양한 조미료가 없었으니까 소금이 비쌌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셨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정결을 상징하고, 맛을 내는 비싼 소금이라는 겁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빛 없이 못 삽니다. 그런데 빛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귀했습니다. 유사 이래 태양신을 섬기지 않은 종족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태양 보고 소원을 빕니다. 일출 보려고 새벽같이 동해로 달려갑니다. 모든 민족이 빛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만큼 빛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구조를 보면 빛이 잘 들지 못합니다. 창이 하나만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룸입니다. 그래서 낮에도 집안에 들어가면 컴컴합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올리브유를 등잔 기름으로 썼습니다. 식용유를 쓴 겁니다. 그래서 빛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런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냐면, 세상은 이미 부패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두셨다는 겁니다. 어둡지 않은 세상에 왜 빛이 필요하며, 부패할 일 없는 세상에 왜 소금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연적으로 세상은 부패하고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탓할 필요 없으며, 세상이 너무 썩었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소금 역할을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하고,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 그리스도인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기능,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흥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 건강하고 밝은 사회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소명을 방기하면 결국 그 사회는 망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악해서 망했습니까? 죄인들 때문에 망했습니까?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선고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서서 중보를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의인을 찾아보겠노라고 했습니다. 50명, 45명, 30명, 20명, 마지막 10명까지 내려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었기에 유황불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썩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어두워집니다. 문제는 빛과 소금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곧 의인들이 제 몫을 하느냐 입니다.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패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즘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 어떻습니까?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요즘 한국 기독교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질근질근 밟히는 꼴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공연히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이런 모욕,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게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못난 탓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맛을 잃으면 이렇게 밟힌다고 주님이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린 겁니다.
그렇다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맛을 내며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사방을 밝힐 수 있을까요? 반드시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녹이고, 태워야 합니다. 산화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해체해야 합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연소시키지 않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기름이든 양초든 횃불이든 다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심지어 저 하늘의 태양도 열심히 자기를 태우면서 열과 빛을 냅니다. 태양은 고체가 아닙니다. 90% 이상이 수소입니다. 그 수소가 핵융합을 통해 열과 빛을 내면서 자기를 소모하고 있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희생을 거부하면 절대 소금되고 빛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양보하고 해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습니다. 익명의 신자로 삽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만 신자로 삽니다. 시침을 떼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삽니다. 소금과 빛을 거부하면서 삽니다. 왜 그럴까요? 희생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인데 십자가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왜 너도 나도 큰 교회로 몰려갈까요? 우리 교회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작고 구차한 지하교회에 여러분이 이렇게 꾸준히 나오신다는 게 너무도 존경스럽습니다. 요즘 지하교회에 다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왜 다들 큰 교회로 갈까요? 희생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신을 녹이거나 태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아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특별하고도 심오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희생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보장하기에 쾌적한 교회로 갑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녹이는 소금이 되라, 자신을 태우는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지금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너무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밟히고 개독교가 된 겁니다. 완전히 짠 맛을 잃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를 냅니다. 독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이게 지금 한국 교회의 꼴입니다. 바닷물은 염분이 3%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은 12-15%가 신자입니다. 바닷물은 불과 염분이 3%인데도 그렇게 싱싱하게 바닷물을 지켜내는데,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한국에 15%가 되는데도 왜 이 사회가 썩고 어둡습니까? 우리가 다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짜라는 얘깁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주님이 어느 안식일 날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인 장애인을 고치는 얘기가 나옵니다. 원래 안식일에는 의술도 노동이기에 사람을 고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고 적대하는 안식일 날 그것도 회당에서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을 보면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꾀했다고 합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그 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죽을 각오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주님은 장애인 한 사람 고치는 일에도 당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결국은 그 사건이 발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비겁하고 안일합니다. 소금이며 빛인데 절대 자기를 해체하는 일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올해는 다시 한 번 대 사회적 책임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란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깁시다. 좀 더 희생을 각오하십시다. 정말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설교영상보기: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7okLV1eN4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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