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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8월 10일 주일오후예배<br>본문: 히 12:1-3<br>제목: 경주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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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p>
<!-- paragraph:p0003 -->
<p><br>지금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데, 우리 선수들이 초반부터 선전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스포츠라고 하면 전 세계가 열광합니다만, 옛날 바울 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헬라의 각 도시는 그 구조가 거의 비슷합니다. 도시 한 가운데는 아고라 라는 광장이 있고, 동쪽에는 경기장이 있고, 서쪽에는 도서관이, 북쪽에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아고라에서는 웅변을 듣고 토론하기도 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했고, 운동장에서는 체력을 연마했고, 도서관에서는 지혜를 쌓았습니다. 헬라문화에서 민주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헬라문화에서 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올림픽이 헬라문화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푸스 신에게 바친 올림픽 경기는 근대 올림픽 경기 이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컸습니다. 고린도 같은 경우에 올림픽 외에도 요즘 유니버시아드 대회처럼 2년마다 열리는 이스무스 라는 대회도 있었습니다. 바울도 당시 헬라의 문화권를 잘 알고 있어서 신앙생활을 자주 달음질에 비유했습니다. 이런 비유가 바울서신에 참 많이 등장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도상의 존재가 우리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경주하자고 합니다(1절). 달음질로 비유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승리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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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오늘 본문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증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 버리라’(1절)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말씀입니다. 육상선수가 어떻게 무거운 옷을 입고 뛸 수 있겠습니까? 육상선수들만 이런 것이 아니고, 체급 경기 선수들도 불필요한 살을 다 빼야 합니다. 정작 경기보다 체중 줄이기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주니어 플라이급은 60kg인데, 평소 그들의 몸무게는 60kg 이상입니다. 지금 우리 여자 복싱선수인 김주희도 주니어 플라이급입니다. 경기가 있으면 10kg를 빼야 합니다. 짤순이에 넣고 짜듯이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짜내야 합니다. 그래도 체중이 줄지 않으면 밤잠 안자고 밤기차 타고 부산을 다녀온다고 합니다. 밤잠을 안자면 체중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근육만 남기고 다 빼는 겁니다. 이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겁니다. 뱃살 붙은 권투선수, 육상선수 보셨습니까? 다 벗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내 몸을 친다는 말은 자학이나 자해가 아니라, 인간적인 미련이나 애착 때문에 포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히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얽매이기 쉬운 것에 발목 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내가 과감히 벗어던져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입니까? 무엇을 내가 반드시 청산해야 할 죄인지 진지하게 집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리하실 것은 빨리 정리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앞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p>
<!-- paragraph:p0005 -->
<p>다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는 겁니다. 이것은 경주자가 가져야 할 절대적인 미덕입니다. 장거리 경주는 결국 인내심의 대결입니다. 저는 1976년 7월 16일에 입대를 했습니다. 저는 훈련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게 구보였습니다. 기온이 30도가 넘어가는데 아스팔트를 뛰다가 낮은 포복을 하면 사우나 이상입니다. 그런데 조교가 그 위를 뛰어 다닙니다. 그러면 정말 오장육부가 쏟아질 듯합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이 아무도 낙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참혹하게 훈련시키는데도 낙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냐면, 낙오해서 맞아 죽느니 차라리 뛰다 죽겠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배우는 것은 오직 하나 인내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갈라디아 6장 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 믿음의 경주인데도 피곤하고 낙심이 된다고 합니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신앙은 인내와의 한 판입니다. 본문 2절 하반절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십자가까지 참은 인내의 화신이셨습니다. 십자가는 아픔만이 아닙니다. 그 모욕과 수모를 참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겁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며 믿음의 경주에서 인내하자는 겁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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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또한 목표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2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경주자는 오직 목표를 향해 뛰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이하입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얼마나 그 목표가 분명합니까? 고린도전서 9장 2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우리를 육상선수와 권투선수로 비유해서 한 말씀입니다. 육상선수가 반드시 골인지점을 향해 뛰어야 하듯이, 권투선수가 상대방을 정확히 가격해야 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확실히 겨냥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곳을 살피면 실패합니다. 마라톤은 42.195km가 최종목표인데, 그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는 겁니다. 지금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이봉주나 김희용 만이 마라토너가 아니라, 우리도 다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마라톤은 출발한다고 다 골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발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출발하지만 중간에 대부분이 낙오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상이 없습니다. 오직 푯대를 바라보고 끝까지 달리는 사람에게 상이 주어집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 이하입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우리의 경주는 영생을 취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생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승리의 면류관을 앞두고 있는 바울의 최후 고백입니다. 사실 올림픽이나 육상 선수권대회 같은 데서 상을 못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받으면 그만큼 좋고 영예롭지만 못 받아도 그만입니다. 그게 아무리 금메달이라 해도 세상이 주는 면류관은 결국 썩을 면류관입니다. 세상의 것 중 썩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이 영원히 썩지 않는 면류관입니다. 믿음의 경기에서 반드시 우리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썩을 면류관은 필요 없습니다. 부디 세상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뛰십시오. 그래서 믿음의 경주에서 바울과 같은 최후의 승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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