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810m: 고정관념과 미래의 빛(요 8:1-11)

2008년 8월 10일 주일낮예배
본문: 요 8:1-11
제목: 고정관념과 미래의 빛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어느 날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 앞에 끌고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 이래도 저래도 걸리는 이런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우선 대답을 하시는 대신에 예수님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글을 쓰셨다는 기록은 이곳이 유일한 장면입니다. 무엇을 쓰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십계명을 썼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여인과 간음한 남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고 했습니다.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긴박한 순간에 주님은 왜 땅에 글을 쓰셨을까요? 흥분한 무리들에게 비수 같은 한 말씀을 던지기 위해 고의적으로 긴장감을 조장하셨습니다. 7절을 보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집중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신 겁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을 해서 상황을 끝내십니다.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돌아가니까 홀로 남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대상을 앞에 두고 무리들은 돌을 손에 들고 처형하려고 했고, 주님은 용서하려고 하셨을까요? 대상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의 입장은 간음한 여인이니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입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런데 주님은 비록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일지라도 그 여인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한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대로 살 지 못했을 지라도 내일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일은 손에 돌을 쥐고 흥분하는 저 사람들보다 경건하고 순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산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산 사람에게는 최종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시각과 무리들의 시각의 차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리들은 죄를 범했기에 죽어야 할 사람으로 보았고, 주님은 비록 죄지었지만 앞으로 새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죄지은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죄를 지었지만 내일은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 내일은 거룩하게 살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살아있는 존재를 고정된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실상은 죽여서 본 것이고, 주님은 내일의 희망을 보시고서 산 자를 살아있는 자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런 시각으로 우리 인생을 보십니다. 죄를 지어서 끝이다가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너에게는 내일이 있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시각과 주님의 시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주님은 우리를 미래의 빛 앞에서 우리를 조명하십니다. 주님은 과거라는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거나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희망의 빛 앞에서, 내일의 빛 앞에서 우리를 조명하시며, 우리의 존재를 용납하고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과거로 그 여인의 현재를 잣대질 합니다. 구도 상으로 보면 얼마나 차이가 큽니까?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을 과거의 이력으로 평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력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내일, 미래만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도 용납하셨고, 세리도 받아 주셨고, 창녀도 스스럼없이 수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8장을 읽었는데, 9장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만났는데,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못 보는 것은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사람들의 시각은 늘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할 때 “죄 때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볼 때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인의 죄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미래의 빛 앞에서 소경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죄, 과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곧 미래를 위해서 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 보고합니다. 그 내용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처형해서 그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겁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일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강합니다. 그래서 늘 반란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시범 케이스로 갈릴리 사람 몇 사람을 잡아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리 사람이 너희보다 죄 많아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죄가 많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수 없이 잡혀 죽은 갈릴리 사람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은 무언가 죄 많아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어느 사람의 현실과 불행을 해석할 때 고정관념, 선입견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종교적인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과거는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과거 팔아먹으면서 사는데,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이력서를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오직 내게 미래만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죽고, 미래에 대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잡혀 살지 않고, 미래의 희망의 빛에서 가능성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이 그 가능성을 인정하셔서 정죄하지 않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며 돌려보냈던 그 여인의 이후 삶은 어떠했습니까? 어거스틴은 본문의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그 전통 때문에 중세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주제로 한 작품에 검고 긴 머리, 가슴을 강조하여 에로틱하게 묘사했습니다. 외경 중에 마리아 복음이 있는데, 거기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죄 많은 여인이었는데, 후에는 주님의 총애를 받은 성녀(聖女)로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누가복음 8장이나 마가복음 15장 같은 데를 보면 늘 주님을 뒷바라지 하고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주님의 수발을 든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을 보면 제자들이 다 달아난 자리에서 주님의 최후 운명을 지킨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이고, 주님의 장례를 확인한 사람도 그녀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갖고 주님의 묘를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뵌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던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와서 돌에 맞아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성경에는 간음하다 잡혀 와 돌에 맞아 죽은 얘기는 있어도, 용서받고 성녀가 된 여인의 얘기는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가능성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실수를 해도 주님은 용서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일이 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사실 과거를 들추면 부끄럼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돌에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로 잣대질 하지 않고, 미래의 빛 앞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은 우리의 내일을 보장하십니다. 이런 시각으로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며, 본문의 여인처럼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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