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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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입니다. 성탄의 계절, 4주 동안 매주 촛불을 하나씩 밝혀가며 주님 오심을 고대하는 대강절입니다. 민족시인이자 승려시인인 한용운의 싯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됐어요. 어서 오세요. …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없이 그분이 오실 수는 없습니다. 나의 기다림과 그분의 오심은 별개가 아니고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 그러므로 만나지 않은 것도 님이 아니요 /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 님은 만났을 때 웃음을 주고 / 떠났을 때 눈물을 줍니다. / 만날 때 웃음보다 / 떠날 때 눈물이 좋고 / 떠날 때 눈물보다 /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 아, 님이여 /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참 마음에 사무치는 글입니다. 맞습니다. 나를 울게 한 그분이 올해도 다시 나를 웃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기다림의 민족입니다. 그 숱한 야화가 다 기다림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망부석 같은 얘기는 참 한국적입니다. 아이를 업은 어미같이 생긴 바위를 보고 저게 바로 기다리다 지쳐 돌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이라고 한 것은 기다림에 지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거기에 투영한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야말로 정말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다림의 신앙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당시의 예배 형식을 보면 사회자가 먼저 큰 소리로 <내가 속히 오리라!>하고 외치면 성도들이 일제히 <마라나타!>하고 응답하며 예배를 마쳤는데, <마라나타>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히브리말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마라나타>(계 22:20)로 끝납니다. 따라서 <마라나타>란 곧 예배의 결론이자 신구약 성경의 결론이며 기독교의 결론인 셈입니다. 계시록이 기록되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로 사정이 매우 절박했습니다. 위기에 내몰렸고, 억울하게 죽어 갔고, 악한 왕들의 능욕을 피할 수 없었던 참혹한 박해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심이 그만큼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서의 <마라나타>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기원이었지만 그러나 재림도 결국 매년 거듭되는 성탄이란 징검다리를 통해 이루어질 종말론적 사건이므로 <마라나타>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염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성도들은 타성에 젖어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해도 으례 교회에서 하는 소리라는 식이고, <성탄절>도 그저 연례행사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라나타>의 소망과 기도가 없는 성도라면 좀 곤란합니다. 아니, 기다려지지도 않는 이가 어떻게 님일 수 있으며, 님이 어떻게 기다려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올해도 주님은 반드시 새롭게 성탄하십니다. 따라서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지구촌에 몰아닥친 환난의 바람으로 온 세계가 떨고 있고, 우리 주변에도 삶에 지쳐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던지는 이웃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따뜻한 눈빛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올해도 주님이 가난한 심령을 찾아 새롭게 성탄 하신다는 사실을 꼭 알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 은혜로운 대강절에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책무일 터입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