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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8년 8월 3일 주일찬양예배<br>본문: 벧후 1:4-9<br>제목: 공급하라!</p>
<!-- paragraph:p0002 -->
<p>[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p>
<!-- paragraph:p0003 -->
<p><br>7절 말씀을 보십시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여러분, 믿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믿음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믿음은 뼈와 같습니다. 뼈 위에 살이 오르고, 힘줄이 놓이고, 피부가 덮여야 합니다. 8절 이하를 봅니다: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믿음 위에 공급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소경이라고 하고, 원시치 못한다고 합니다. 즉 멀리보지 못한다, 안목이 없어지고 근시안이 된다는 말입니다.</p>
<!-- paragraph:p0004 -->
<p>그러면 믿음에 우리가 공급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믿음에 덕이라고 합니다. 덕이 바로 믿음에 공급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덕은 고상한 품성을 가리킵니다. 품위와 격조를 뜻합니다. 믿음에는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천박하거나 저질스러우면 안 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절하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천하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가장 고상하고 품위 있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믿음은 그래야 하는데 우리가 너무도 천하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다가 아니고 거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는 덕을 공급하는 데는 너무도 무책임하고 소홀했습니다. 신자가 봐도 너무 역겹고 민망한데, 다른 사람이 보면 오죽하겠습니까?</p>
<!-- paragraph:p0005 -->
<p>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성, 감정, 의지의 본체십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는 하나님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인격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락해서 그 품성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말씀은 바로 인격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p>
<!-- paragraph:p0006 -->
<p>다음으로 믿음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만 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맹신이요 광신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믿음을 반지성적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역시 우리가 잘못 심은 이미지입니다. 믿음은 지성적인 것입니다. 왜 믿음이 지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인데,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그 대상에게 내 생을 걸고 결단합니까?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도박입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알아야 믿을 수 있고, 안 만큼만 믿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믿음은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결단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세아는 이 백성이 하나님이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고,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고, 제사도 번제도 다 그 다음입니다. 무속종교는 대상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건 치성만 드리면 됩니다. 그저 절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지적인 종교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지식을 더하라는 겁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참된 지식이 기초가 되어야 건강하고 든든한 신앙이 되며, 품격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강요하지 않고 윽박질러 믿음을 강요합니다. </p>
<!-- paragraph:p0007 -->
<p>믿음에 필요한 것은 절제입니다. 믿음에는 덕과 지식이 공급되어야 하고, 절제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절제는 신자들의 아름다운 미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절제는 신앙의 필수항목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일요일 날 세차도, 사우나도, 가족과 공원산책도, 외식도 해야 하기에 신앙생활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난감해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누군들 사우나 하고, 세차하고, 외식하고 싶지 않을 사람 어디 있습니까? 정 이런 것을 못해 억울하다면 신앙생활 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자제하고 절제할 줄 모르면 신앙생활 못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욕구를 엄격히 통제하고 조절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자기에게는 혹독하고 남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하는 것 다하고 즐기는 것 다하면서 언제 신앙생활 합니까?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다 즐기고 가지려고 합니다. 교회도 신자도 얼마나 제 몫 챙기기에 혈안인 줄 모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5절 이하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고 했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절제와 자제는 철저한 자기관리입니다. 그래야만 이기고 상을 얻습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아직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가기 전까지 우리의 구원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제하고 절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도상의 존재입니다. 앞의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 갈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에게 절제와 자제, 혹독한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믿음에 절제를 공급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격조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시는 경주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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