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0m: 감사의 축제(요 6: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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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0일 주일낮예배/추수감사주일
본문: 요 6:5-13
제목: 감사의 축제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1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주님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다는 것은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초라한 오병이어를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허기진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시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벌어진 오병이어의 기적은 주님의 감사의 기도로 시작된 그야말로 감사의 축제였습니다. 우리의 감사절 축제에도 주님의 이런 풍성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봅시다. 우선 6절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는 이미 대책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단지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주님이 물으신 겁니다. 주님은 자주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 놓으시고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시험을 통과하면 은혜를 베푸시고 기적도 허락하십니다. 주님은 절대 은혜를 남발하시지 않습니다. 함부로 기적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에, 우리 그릇이 마련되었을 때에 은혜도 기적도 허락하십니다. 채비도 안 되었는데 은혜와 기적을 베푸시면 우리에게 영광이 아니라 도리어 욕이 됩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주님의 시험에 어떤 성적을 냅니까? 빌립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입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계산 한 번 빠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계산이 나왔습니다. 200데나리온 요즘 돈으로 2000만 원의 떡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먹일 돈이 없다는 겁니다. 빌립은 이해와 타산이 밝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모든 일을 치밀한 계산으로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전에 승산을 저울질해보고 안 된다 싶으면 체념합니다. 당연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이진 않습니다. 신앙은 때로 수학적인 계산을 뛰어 넘습니다. 이성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반드시 돈으로만 떡을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는 기적을 통해 조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인간적 계산과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으로만 반응했습니다. 따라서 빌립의 답안은 주님이 바라시던 모범답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출제하신 문제는 수리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수리문제로 보고 산술적인 답을 한 겁니다. 그래서 빌립이 재수했다는 것 아닙니까.
다음은 안드레입니다. 8-9절입니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래도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낫습니다. 빌립은 아예 앉은 자리에서 계산만 하다가 끝냈는데, 안드레는 그래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제 먹을 게 있는지 없는지를 다니며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도 역시 주님이 기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병이어를 발견한 안드레가 하는 말이,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굶주린 장정만 5천 명이 넘는데 오병이어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주님께 체념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은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떡을 찾아다니긴 하나, 매사에 부정적입니다.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골치 아픕니다. 주님은 빌립처럼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나 일을 하면서도 늘 비관주의자요 회의주의자인 안드레를 통해서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 둘은 아직 함량 미달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기엔 아직 덜 된 사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아이입니다. 9절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이 아이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 한 아이가 자기 한 끼 분의 도시락을 바친 겁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이를 비웃습니다.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는 겁니다. 당시 아이는 무슨 맘으로 오병이어를 내놨을까요? 빌립처럼 나름대로 계산을 해보고 내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산 했으면 절대 못 바칩니다. 안드레처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고 바쳤을까요?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냥 그 아이는 먹을 것을 찾는 주님 말씀에 계산이나 기대 없이 소박하게 자기 도시락을 내민 것입니다. 절대 빌립처럼 계산하거나, 안드레처럼 회의에 빠졌다는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냥 단순히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 겁니다.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남의 이목 생각하지 않고, 빌립은 묵살하고, 안드레는 비웃었지만 거기에 개의치 않고 자기 가진 것을 그냥 드린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누구인들 5000명을 먹일 빵을 갖고 있었겠습니까? 그저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는 것,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이름 없는 한 아이의 헌신을 통해 당신의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계산 밝은 빌립이 아니라, 회의적이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안드레가 아니라 주님 말씀에 단순히 응답한 한 아이가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아무리 주님이라고 해도 우리가 뭔가를 바쳐야 그것을 소재로 어떤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 아이가 오병이어를 바친 것을 뻥튀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오병이어에 담긴 그 아이의 중심을 갖고 기적을 행하신 겁니다. 오병이어 없이도 얼마든지 더 위대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보리떡 하나면 어떻고 물고기가 한 마리면 어떻습니까? 그게 우리의 최선이라면 주님은 기쁘시게 그것을 받고 위대한 기적을 베푸시며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거기에 담긴 우리의 중심이 중요한 겁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게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먹이신 겁니다. 뻥튀기가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증식시켜서 먹이신 게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중심이 담긴 오병이어를 헌상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빌립 같은 이성주의자나 안드레 같은 회의주의자는 외면하고 버리십니까?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는 이성주의, 회의주의자들에 대한 배려도 숨어 있다고 봅니다.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절대 비이성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반(反)자연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병이어가 없이도 얼마든지 주님은 5천이 아니라 5만 명도 먹이시고, 12바구니가 아니라 120바구니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것은 이 세상 모든 실증주의자, 합리주의자, 회의주의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절대 자연적인 질서를 파괴하거나 거스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대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고, 최대한 상식적인 사건입니다. 주님이 돌로 떡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만드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안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돌로 떡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나무 막대기로 물고기 만드신 게 아닙니다. 무화과로 포도를 만드신 게 아닙니다. 보리떡으로 보리떡을 만드셨습니다. 절대 무로부터 창조하신 분이기에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으나,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이 먹고 남을 물고기를 만드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도 보리떡 5개로 5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보리를 심고 또 심어 5천 명이 먹을 수 있도록 증식시키는 겁니다. 물고기도 2마리로 시작해서 양식하는 겁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속성 재배가 있고, 유전자 조작도 있습니다. 사람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현장에서 5천 명이 먹고 12바구니나 남을 만큼 하신 겁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물을 포도나무에 주면 몇 개월 후면 그게 포도가 되는 겁니다. 과학적입니다. 그것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과학성을 부정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비과학적입니다.
기적 때문에 회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기적을 반 자연적이거나 반 이성적인 미스테리로 치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무지를 탓하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지만, 굳이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깊은 뜻을 헤아리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수중의 오병이어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 좌절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한 아이처럼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가족 모두가,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 모든 배고픈 사람이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설교영상보기: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X8Z0F7bGG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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