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1113m: 행복한 사람(빌 4:4-7)

2011년 11월 13일 주일낮예배

본문: 빌 4:4-7

제목: 행복한 사람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한 가지를 여쭙니다. 바울은 행복했을까요? 불행했을까요? 답이 단순합니까? 아니면 복잡하십니까? 저는 아무래도 바울이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행복하지도 않는 사람이 남에게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도 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남에게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감사하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가 행복하지도 않으면서도 남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위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말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이야말로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딱하고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우선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를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18개월 간 머물며 전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여러 문제가 많았습니다만, 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한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우선 사도(아포스톨로스)라고 하면 주님의 직계 제자이거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당신은 주님의 직계 제자도, 주님 살아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살아생전에 주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 바울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도망간 그리스도인을 색출하러 가다가 강렬한 빛에 고꾸라집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때에 바울이 주님을 뵈었고, 주님은 바울에게 사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것은 바울이 위장 개종했다는 사람에게 주님이 친히 해명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계속하여 바울의 자격 시비를 걸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그래서 바울은 사도 자격 미달이라는 겁니다. 바울의 외모와 언어에서 사도로서의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2-3세기 사이에 나온 외경에 보면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이란 게 있습니다. 테클라는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바울을 모신 충성된 여성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테클라가 나오는 성화도 있습니다. 5세기 성화에는 바울과 나란히 나오기도 합니다. 이 책에 바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바울은 땅딸막하고, 대머리며, 다리가 양쪽으로 벌어졌고, 발이 안으로 틀렸으며, 약간의 매부리코에, 미간의 눈썹은 짙어 강한 인상을 주나 얼굴은 언제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했다.’ 또한 <바울행전>이란 2세기말의 외경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며 안짱다리에 매부리코나 인상은 몹시 온화하였다.’ 한마디로 바울은 못생겼던 것 같습니다.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말이 신통찮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이 지적에 대해 긍정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울이 실제 달변이 못되고 어눌했다는 뜻일 수도 있으나 케제만 같은 신학자는 그런 뜻이기보다는 바울이 활동하던 헬레니즘 지역에서는 이상한 말소리로 말하는 신비적 웅변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매우 환상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을 신비한 분위기로 몰아가는 웅변가들이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바울에게는 그런 게 전혀 안 보였다는 겁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얼마나 고약했습니까? 자신이 개척한 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고린도에서 쓴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도 바울은 늘 기뻐하며 지냈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날을 보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여건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지만, 바울은 몸을 찌르는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 가시는 바울에게 혹독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바울은 스스로 ‘사탄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탄의 저주’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는 아픈 가시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병이었을까요? 무서운 두통이었다, 학질이었다, 안질이었다, 간질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갈라디아교회 같은 성도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병 때문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만은 하나님은 받은 은혜에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불행한 운명은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도 유난히 기쁨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바울이 가장 행복할 때 쓴 편지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바울은 이 서신을 로마 감옥에서 썼습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같은 서신이 다 최악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사도가 언제 끌려 나가 참수를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가 기쁨에 충만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이 거짓으로 이 편지를 썼겠습니까?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기쁨은 철저히 조건반사적입니다. 상대적이고 본능적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으면 감사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백하고, 바울이 우리에게 권하는 감사는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나를 배신해도, 내 몸에 가시 같은 병이 있어도, 그걸 놓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셔도, 무고하게 감옥에서 사형수로 수감생활을 해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불가사의한 감사, 전천후의 감사, 무조건적인 감사, 그런 수수께끼 같은 감사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내일이면 끌려나가 목 잘릴지도 모르는 감옥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바울이 우리에게 권하는 감사와 기쁨을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바울처럼 역설적이고 전천후의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완전히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 이하에서 여인들의 출산 얘기를 합니다. 아기를 출산하는 일은 죽음만큼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엄마들은 임신하고 출산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아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존재가 엄마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고통스럽지만 행복합니다. 바울 자신의 기쁨, 행복은 바로 그런 거란 겁니다. 자식을 키울 때도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엄마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한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겁니다. 지금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연세도 높고 병도 갖고 있어 농사지을 수 없는데도, 악착같이 농사지어 그 수확물을 매년 자식들에게 보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부모님 가슴에 자식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모님께 그것을 못하게 하면 돌아가십니다. 그 노동과 농사를 통해 그분들은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맛봅니다.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행복해 하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여건, 조건,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해 하며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존재에 주님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그러면 삶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해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적어도 그런 것입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주님의 존재로 자신을 가득 채우며 살았기에 바울은 모든 게 다 감사였습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보다 더 최악의 환경은 없습니다. 결코 꿈같은 얘기나 비현실적인 망상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으로 가득 차면 늘 기쁨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의 조건과 여건을 상대화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주님으로 충만하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그 순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행복해집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바울이 권하는 전천후의 감사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설교영상보기: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RFb2lTMAl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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