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선망의 차원을 높이라

지금은 모두가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제사정이 갈수록 악화돼 모두가 <빈궁의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더는 가계 빚 이자를 갚지 못해 파산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고, 굳이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니라 해도 음침한 불황의 그림자가 계속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통에 모두가 불안해하며 당혹스러워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기야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유수한 나라들의 부도 위기로 유로존 전체가 흔들리는 마당에 우리 사정은 그나마도 좀 나은 수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주님께 <선생님, 제 형에게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좀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했습니다. 적어도 주님이시라면 자기들의 유산분쟁에 공정한 해결사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즉각 그의 청을 거부하시며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인으로 세웠단 말이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이득을 위해 주님의 권위를 동원하고자 했던 그 사람이 머쓱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바로 저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얘깁니다. 

사실 거기 나오는 부자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의 표상이었습니다. 본래 부자인데다 그해 농사마저 최대 풍작을 이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꼬?>하며 즐거운 고민에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나도 평생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고민을 해봤으면>하고 부러워했을 법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도 참 불공평하시지, 이미 많이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이 주시는 건 다 뭐람!>하며 불평을 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비유의 주인공이 사람들의 무한한 <선망의 대상>에서 졸지에 가장 딱한 <연민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그러면 이것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물론 주님은 그가 부자라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부>란 고작해야 자기 한 몸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돈은 많았을지 몰라도 그 이상의 삶은 넘지 못한 <싸구려 인생>을 산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는 자는 결국 이렇게 망한다는 주님의 마지막 경고는 물질적 풍요가 결코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밝히신 주님의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사실 가난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은 그 수단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어쩔 수 없이 물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도 도덕적 설득력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란 가난이 주는 궁핍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뛰어넘기에는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부>에 대한 윤리적 절제를 설교하시기보다 확연히 다른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하신 겁니다. 한 마디로 <선망의 차원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고개를 빼들고 간절히 바라는 그 <물질적인 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이런 정도의 물질적 시련과 염려로 좌절하거나 나의 꿈과 이상을 접을 수는 없다>는 마음의 각오를 새로이 가지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절실한 소망이 있는 한 <물질의 많고 적음이 나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는 자신감에 넘쳐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 이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 오직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더 하실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제발 물질에 대한 염려로 낙망하지 맙시다. 그것 때문에 생명의 기운을 꺾지 맙시다. 주님 말씀대로 인생의 가치는 절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바로 그 점을 일깨우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