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0m: 항상 기뻐하라!(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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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0일 주일낮예배
본문: 빌 4:4-7
제목: 항상 기뻐하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본문 4절을 다시 보십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항상”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씀도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기뻐할 일보다는 우울한 일, 슬픈 일이 더 많지 않습니까. 세상사, 인생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다보면 기쁜 일을 만나는데 굳이 기뻐하라고 하지 않아도 조건반사적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슬픈 일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기뻐하는 것만 미덕일 수는 없습니다. 다 슬픈데 나만 기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 자신을 봐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기쁨보다 고난이나 슬픔을 더 많이 당하고 산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일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울 당시의 사정과 형편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바울 당시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모진 아픔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해서 교회를 설립했는데, 그 사람들이 작당해서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사도라면 주님의 직계 제자를 뜻하는데, 주님의 부활을 목도한 증인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열두 제자에 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뵌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격미달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그의 글이나 편지를 대하면 깊이가 있고 무게감이 있는데, 막상 대면하여 보면 말이 시원찮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외모에 사도의 품위가 없다는 겁니다.
바울이 몸이 약했다거나 외모가 별로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서구 전통의 그림을 보면 바울을 그린 그림은 대체로 흉합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병을 사단의 사자, 사단의 저주라고도 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고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가진 병이 무엇이었을까요? 각종 설이 많습니다. 지독한 두통이라고도 하고, 각질이라고도 하고, 안질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편지를 대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실컷 설교하고 내려가다가 발작하면 그 모양이 어떠했겠습니까? 어쨌든 바울의 병은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할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지병을 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빌미로 삼은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말이 시원찮았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탁월한 웅변력이 있었을 듯한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그러나 저명한 신약학자들은 헬레니즘의 신비주의를 주목합니다.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에서 웅변술로 사람들을 황홀경으로 몰고 가는 것을 영감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기도원에서 집회하는 강사 같은 사람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 웅변술이 바울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바울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흥분시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고린도 교회가 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한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이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직업은 장막짓는 장인이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소위 바울은 무자격자이기에 무급 선교사로 활동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당시 바울의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고약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바울의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 와중에 고린도 교회에서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편지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인데, 이 빌립보서는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서도 기쁨을 많이 말해서 어떤 이는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서를 가장 좋은 시절에 쓴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씁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최악일 때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로마의 습기찬 지하 감방에 갇혀 있고, 언제 참수당할 지 모르는 사형수의 몸으로 어떻게 기쁨을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일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역설적이고 초월적이고 전천후의 기쁨입니다.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본능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모함하고, 가시처럼 나를 찔러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실제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폴 틸리히 라는 신학자는 본래 유대인인데, 나치에게 쫓겨서 미국에 가서 철학도 강의하고 신학도 강의한 학자입니다. 본래 그의 전공이 철학적 신학이었고, 실존주의 신학자였습니다. 이 분은 기쁨과 즐거움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 4장 19절이하에 보면 바울이 여인들의 해산의 고통을 말합니다. 해산은 절대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거기에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없지만, 기쁨을 추구하면 아픔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이 다르다고 합니다. 바울도 이와 같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항상 기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쁨으로 희생을 감수합니다. 오히려 더 희생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설적인 기쁨을 위해서는 나의 사랑의 대상이 언제나 나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기뻐하는 이유는 자식이 그 부모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향한 애정과 사랑이 그 부모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나깨나 자식 사랑 때문에 희생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것을 다 감수합니다. 같이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가의 삶이 고생스럽고 가난해도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기뻐합니다. 요즘은 예술이 돈이 좀 됩니다만, 옛날에 예술이 어디 돈이 되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자기의 예술에 생을 바칩니다. 사랑하니까 거기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겁니다. 가난해도 좋고, 먹을 것이 없어도,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가득 차면 어떤 경우에도 전천후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충만하면 어떤 고생이나 희생도 기쁨으로 접수됩니다. 즐겁지는 않지만 얼마나 보람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부담스럽고 본전 생각이 나십니까? 애정이 식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으로 여러분이 충만하면 아깝거나 억울하거나 고되지 않습니다. 마냥 기쁘고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식은 겁니다. 주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사라지고, 장사속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계산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존재 그 자체가 그냥 내게 충만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고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어떤 고생도 견딜 수 없습니다. 어떤 희생도 접수할 수 없습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여기에 무슨 기쁨이 있으며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겠습니까? 예술가가 예술 그 자체에 심취해야지 그걸 팔아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 기쁨이 없습니다. 자식 그 자체가 좋아야지 이 놈 잘 키워 내가 호강해야지 한다면 이미 기쁨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부자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장삿속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충일해야 하고, 주님의 존재 자체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누가 나를 대적해도, 감옥에 가도, 내 몸에 병이 들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디 주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충만하십시오. 주님 존재 그 자체로 여러분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래서 실제로 행복해 하시며 보람을 느끼며 사십시오. 이 말씀은 결코 비현실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만 있는 우아한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 행복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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