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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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 쪽 손이 불구인 장애인을 구하는 일 자체를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유대인들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왜 그들이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행하신 주님의 치유사역에 시비를 걸고 나섰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들의 질투심 때문으로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도 주님의 행위가 선한 것인 줄을 몰라서 문제를 삼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선한 일을 선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다른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그 행위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었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또 왜 굳이 응급환자도 아닌 장애인을 안식일에, 그것도 사람들이 예의 주시하는 회당 안에서 고치신 걸까요?
그렇습니다. 당시 주님의 그 행위는 다분히 고의적이고 도발적이셨습니다. 주님이 시비하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하고 물으신 것은 본래적인 뜻을 저버리고 맹목적으로 안식일과 평일을 구분하는 그들의 이원론적 신앙을 비판하고, 고식화되고 형식화된 유대인들의 낡은 종교 관념을 철폐함으로써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비신화화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안식일의 특수성을 철폐하신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의 의미를 모든 날, 모든 삶의 지평으로 확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하다면 평일도 거룩하다는 것이고, 성전이 거룩하다면 다른 삶의 현장도 다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안식일, 성전, 성직만이 거룩할 뿐이었는데 그런 이원론 사고가 자칫 믿는 자들의 신앙과 생활에 분열을 일으켜 삶을 병들게 할 수 있고 실제 우리가 늘 그런 모순 속에 빠져 산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삶에 만연된 그런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셨기에 절대라고 우기는 안식일을 상대화하고 보편화시켜 모든 날을 다 거룩한 날로 새롭게 해석하신 것이고, 또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특정한 공간만을 거룩하게 보려는 사고를 비판하신 동시에 모든 삶의 영역을 다 거룩하게 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당시 주님의 행위는 분명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게 결국은 기존의 질서를 유린했습니다. 또 안식일법의 궁극적인 의미를 되물으셨던 주님의 질문은 옳았고 따라서 그 안식일법은 반드시 변혁되어 마땅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악법이라는 전제로 실정법 파괴에 대한 책임은 안 져도 좋은가하는 것입니다. 비록 문제가 있다 해도 그걸 파기해 버리면 그 질서에 의존해 세워진 다른 많은 것들이 본의 아니게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주님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사랑을 결행하셨다는 것은 실로 그게 비장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는 얘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주님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막 3:6)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주님은 죽음마저도 각오 하셔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그때 주님이 실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복음서는 그 사건이 바로 주님의 죽음의 최초 동인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주님 또한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는 듯 그 일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고 행하셨다고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이게 뭡니까? 도처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개혁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무력한 걸까요? 개혁을 내세우면 뭔가가 희생될 것을 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은 자신의 결단에 대해 책임질 각오를 하셨기에 죽이겠다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행하셨고, 또 타락한 유대교에도 반기를 드셨습니다. 사랑이나 개혁은 희생이나 수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고 개혁하려고 하면 이미 그것에 대립되는 또 다른 현실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원만한 인격을 기르자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책임적인 주체이기를 요구하는 분이십니다.
책임질 각오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