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9w: 고린도후서 강해 18(고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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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9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18
본문: 고후 10:1-7
[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장과 9장의 주제는 연보입니다. 10장의 주제는 바울의 사도권 시비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의 발목을 잡은 것이 바로 사도권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에 시비를 걸었습니까? 2절에 보면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는 말이 나오고, 7절에는 “너희는 외모만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외모만 본다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근거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사도는 주님의 직계 제자를 뜻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다녔으며,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주님과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은 직접 주님을 따라다닌 적도, 목격한 적도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그 주님으로부터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든 후서든 그 시작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은......’ 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사도됨을 서두부터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10절입니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 자신도 주님의 사도가 된 것은 확실하나, 자신은 사도가 되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증합니다. 너희(고린도 교회)가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지, 신앙적으로 보면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직의 위임을 받았기에 하자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서열로 보면 맨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10절입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를 삼은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바울의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사도의 카리스마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라고 하면 그럴 듯하고 남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바울의 글은 괜찮은데 직접 만나보면 그런 카리스마가 안 보인다는 겁니다.
바울의 몸이 약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육체에 가시를 주었다고 합니다. 가시란 말은 아주 치명적인 아픔을 뜻합니다. 어쨌든 바울은 육체적으로 가시와도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것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으면 바울은 자신의 아픔을 ‘사단의 사자’ 곧 ‘사단의 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사라지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은혜라는 겁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제동장치를 걸어 둔 겁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면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저런 육체의 가시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육체는 사람이 시험에 들만큼 문제가 많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4절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고 합니다. 바울을 대하면 사람들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육체의 결함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충분히 시험에 들 수도, 업신여길 수도, 버릴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해 줘서 고맙다는 겁니다. 바울의 병이 안질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일 겁니다. 간질이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바울의 병입니다. 간질이라면 바울 때문에 시험에 들 수도, 육체의 가시라는 말도 이해됩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사람들이바울을 볼 때 사람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서구에서 바울을 그린 모습을 보면, 키는 작고, 배는 불뚝하고, 코는 메부리코이고, 앞으로 허리가 굽은 모습 말입니다.
또한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시비한 것입니다. 일단 이것을 바울도 인정합니다. 11장 6절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바울이 말이 시원치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실제 말이 어눌했을 수도 있습니다. 말재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수사학적 웅변술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런 쪽으로 보지 않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방을 지배했던 헬레니즘의 신비주의를 말합니다. 고린도 지방은 헬라문화의 한복판입니다. 헬라문화에는 신비주의가 심했는데, 열광적인 웅변을 해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환상적인 체험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인기있는 학문이 수사학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화술이 유행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수사학 교수였습니다. 수사학을 잘 해야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적인 열광적 웅변술이 바울에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이 어눌했다는 뜻이 아니라 환상적인 화술이 없었다는 겁니다.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자들은 명상하고 있다가 대중들 앞에서 불을 토하듯 웅변하였는데, 바울에게는 이런 면이 없었다는 겁니다. 적어도 주님의 사도라면 그런 화술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광적 화술을 기대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11장 5절입니다: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그러니까 내가 육체에 가시를 갖고 있고, 너희들이 기대하는 탁월한 언변은 없지만, 나도 부족함이 없는 사도라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이 사도직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며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명감이 대단합니다. 사람들이 바울더러 사도가 아니라며 그 이유를 아프게 갖다 대는데도 바울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고린도전서뿐만 아니라 후서에서도 자신의 사도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과 같은 담대함,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당합니다. 우리의 신자됨, 교회됨을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널 보고 신자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입니다. 긍지를 가집시다. 신자됨, 사도됨은 주님의 부르심이지 외모, 건강이 그 기준이 아닙니다. 떳떳하게 신앙생활 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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