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아둘람의 노래

다윗이 숨은 아둘람 굴은 유다 광야 바위산에 있었습니다. 지세가 워낙 험해 사울의 군사들이 쉽게 추적하거나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천연동굴이라 도망자의 은신처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어쨌든 목숨은 간신히 구했지만 사울에게 몰릴 대로 몰린 당시 다윗의 심경은 천애의 고아와도 같았을 것이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동안에는 아마도 걷잡을 수 없는 좌절감이 밀려 왔을 것입니다. 이제 시간은 사울 편이고 자신은 히브리 역사의 대세에서 완전히 배제된 체 극심한 소외감으로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지금은 그래도 도피처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 다시 사울의 군대가 닥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고백한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연 다윗의 어조가 바뀝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은 흔들림이 없나이다. 진실로 내 마음은 확고하나이다.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내 영혼아 깨어날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은 원래 수금을 잘 탔고 언젠가는 사울이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수배를 당해 도망자 신세가 된 후로는 언제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는 여유를 가졌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잊고 지내던 수금과 노래를 엉뚱하게도 그 음습한 아둘람 굴에서 되살려 낸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절박한 위기에 직면해 탄식하고 체념하기보다 희망을 노래하고 수금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새벽을 깨우기는 커녕 도리어 밤의 어두움에 삼킴을 당한 듯한 그가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와 담력을 얻었을까요? 사무엘상 22장 2절은 당시 아둘람 굴에 피신해 있던 다윗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게 바로 당시 다윗이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자기를 쳐다보고 자기의 행동 하나하나에 희망을 걸며 새로운 삶의 출발을 꿈꾸는 사람들 앞에서 차마 의기소침해 하거나 탄식하며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둘람 굴은 더 이상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용기를 다지는 재기의 터로 바뀌었고, 다윗 역시도 어두움의 횡포에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의와 다짐으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당시 다윗의 가슴속에 그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역사에 대한 뜨거운 비전이 없었던들 아둘람의 굴은 한낱 강도떼들의 소굴이나 도적들의 산채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둘람의 노래는 허기지고 고단한 심령들에게 주어진 위로와 축복의 선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외롭고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의 벗이 되길 원하고 때로 사는 일이 버거워 피신하는 이들에게 아둘람의 굴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물론 우리 사정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보다 더 어려운 자들이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찾고 있는 이상 결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새벽을 깨우고 내일을 엽시다. 더불어 희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그러면 이곳도 더 이상 낙담과 탄식의 소굴이 아니라 은혜와 감사가 샘솟는 아둘람의 동굴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