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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div>2011년 10월 9일 주일낮예배</div>

<!-- paragraph:p0002 -->
<div>본문: 엡 1:3-6</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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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구원 성화 영화</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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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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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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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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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저는 지난 16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오로지 이 세 가지 주제만 설교를 했습니다. 구원, 성화, 영화입니다. 목회시작하면서 첫 주일부터 이 주제를 설교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설교했습니다. 제가 한 모든 설교는 이 범주 안에 있습니다. 다만 제목과 본문만 다를 뿐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 성화, 영화입니다. 저는 적어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목회현장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복음은 구원, 성화, 영화 이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바로 이 세 가지 주제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주제에 관한 한 여러분이 이해를 못하신다거나, 이 주제를 논할 때 머뭇거린다거나, 이 주제에 대해 미심쩍어 하신다면 제가 시험에 들 것입니다. 저의 좌절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명명백백하게 이 세 가지 주제를 전하라는 뜻으로 주님이 저를 목회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주제만 나오면 치를 떨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도 이 주제를 많이 설교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주제만 나오면 흥분됩니다. 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더 목회를 할지 모르겠으나 이 세 가지 주제만 붙잡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주제에 관한 한 누구를 붙잡고도 이 주제를 명쾌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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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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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믿음의 대가입니까? 믿음의 보상이며 반대급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입니까? 구원은 선물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구원은 믿음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구원의 전제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물입니다. 구원의 열매가 믿음입니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구원 얻었기에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하는 나무를 의미하고 확인시키며 증명하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사과가 사과나무에 열매가 안 열려도 사과나무입니다만, 사과가 열리면 사과나무인 줄 아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구원 얻었음에 대한 물증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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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 paragraph:p0011 -->
<div>그러면 우리가 언제 구원을 얻었습니까? 창세 전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 곧 미리 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믿을 때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은 우리가 창세 전에 택함 받아 구원 받았다는 것을 최초로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div>

<!-- paragraph:p0012 -->
<div><br></div>

<!-- paragraph:p0013 -->
<div>따라서 구원은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누구도 구원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사고나무가 아닌데도 어떻게 사과가 열립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나무가 아닌 한 절대 믿음이라는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겁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미리 결정하셨기에 때가 되어 믿음이라는 열매가 열린 게 아닙니다. 사고나무라 해서 첫 해부터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기에 때가 되어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내 행위의 결과라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본질만큼이나 절대적이며 영원합니다. 한 번 해병도 영원한 해병이듯 하나님이 이룩하신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왔다갔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적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구원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div>

<!-- paragraph:p0014 -->
<div><br></div>

<!-- paragraph:p0015 -->
<div>그러면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이나 신약의 가룟 유다의 케이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였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색을 드러내고 제 갈 길을 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받은 구원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가라지로 전락한 것이 아닙니다. 알곡은 처음부터 알곡이고,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입니다. 알곡이 타락해서 가라지가 되지 않고, 가라지가 거듭나서 알곡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는 가라지로서 알곡 사이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주인의 곡간이 아니라 불구덩이로 갑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선택 받은 땅은 옥토인데, 옥토에만 씨앗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가시밭, 돌짝 밭, 길 위에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떨어진 씨앗은 곡간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가 구원을 관리하지 못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알곡 사이에 낀 가라지였습니다.</div>

<!-- paragraph:p0016 -->
<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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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구원이란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한 번 구원이면 영원한 구원이라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을까요? 죄 지어도 우리의 구원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는 문제는 당연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원은 손상시킬 수 없지만 우리의 성화(聖化)를 방해합니다. 성화는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지는 겁니다. 우리의 최대 과제는 성화입니다. 거룩입니다. 성경의 2/3가 성화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윤리, 도덕, 율법이 다 성화를 위해 제시된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손상시키진 못하나 죄를 지으면 우리의 성화를 방해합니다. 성화가 우리의 지상목표입니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었습니다. 사실 애굽에서 팔레스틴까지는 먼 거리가 아닙니다. 한 달이면 족히 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왜냐면 그들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노예의 때를 다 벗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시려고 40년간 광야에서 유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데려가시면 좋은데, 여전히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것은 성화 때문입니다. 즉 천국에서 살아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조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말미를 주신 것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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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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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어떻게든 주님의 모습처럼 거룩하게 변하는 것, 이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 문제입니다. 구원에서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화의 주체는 우리, 나 자신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결단하며,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말씀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화는 주님이 대신해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대신해 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은 내 안에 보혜사로 계시면서 성화를 부추깁니다만, 성령이 내 안에서 성화를 대신해 주시진 않습니다. 나를 강가까지는 끌어가시나 물은 내가 마시는 겁니다. 성화의 주체는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것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구원은 내가 믿었으니 성화는 주님이 해 달라고 합니다. 그토록 내가 기도했는데 안 도와주셨다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 책임을 다 성령께 떠넘깁니다. 성화는 내 몫입니다. 성령이 대신해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성령은 나를 성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죄다. 그것은 믿음에 도움이 안 된다며 계속해서 내 양심에 호소하시며 내 양심을 찌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것을 짓누르고 죄를 강행합니다. 여러분, 성화는 성령이 대신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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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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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왜 우리가 성화되어야 합니까? 왜 성화가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지상목표입니까? 왜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며 반드시 성화를 이룩해야 합니까? 물론 성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천국가서 문화적 충격 때문에 애로가 많을 것입니다만, 성화가 영화(榮化)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세계에 들어가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천국 가서 누릴 영화의 수준이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룩한 성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심판이 아니라 천국에서 누리는 상급의 수준을 결정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아주 공평한 세계입니다. 아주 공명정대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차등의 세계입니다. 전체주의의 세계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계급이 똑같은 세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해의 영광, 어떤 사람은 달의 영광,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 별 중에서도 각기 다른 영광을 누립니다. 왜냐면 이 땅에서 성화이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 심판이 공정하고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화가 중요한 이유는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이기에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는 이유 외에도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수준을 결정하기에 그렇습니다. 천국에서의 삶은 천년만년이 아닙니다. 영원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대단히 중요하고 성경은 오직 성화를 강조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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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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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고린도전서 3장 10-15절입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유명한 말씀입니다. 성화와 영화를 이것보다 더 잘 표현한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일생 동안 집을 짓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서는 이 집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풀로, 나무로, 돌로, 금이나 은으로 집을 짓는다는 겁니다. 금이나 은으로 집을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투자와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이는 나무나 짚으로 손쉽게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다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불의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소재로 어떻게 지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혀줄 불의 심판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을 만나면 더 정제가 됩니다. 순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가차 없이 재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불의 심판 앞에서는 속일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재질로 집을 짓고 계십니까? 성화에 실패해도 천국에는 갑니다.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집을 지어도 천국은 갑니다. 구원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은 15절 말씀처럼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나무나 짚은 불에 다 타버리고 마치 거지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턱걸이로 받으나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겁니다. 호텔이나 사우나에 불이 나면 벌거벗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은 구하지만 그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얼렁뚱땅 자신의 영원한 집을 짓지 마십시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은으로 금으로 보석으로 지으십시오. 그것이 천국에서 영원한 영화를 보장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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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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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설교영상 보기: <a h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C2qMqGuVQVM$">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C2qMqGuVQVM$</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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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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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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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paragraph:p0029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br></span></div>

<div class="archive-resource-links"><a href="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C2qMqGuVQVM$" title="원문 미디어 링크 (이용 상태 미확인)"></a></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