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629m: 염려(마 6:25-34)

2008년 6월 29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6:25-34
제목: 염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님이 유대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인데, 우리는 의식주입니다. 입는 것부터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이 귀한 나라이기에 먹는 것 다음에 마시는 것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은 집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장막에서도 초막에서도 살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입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먹는 것보다 입는 게 더 중요합니다. 못 살아도 옷은 반듯하게 입어야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옷을 잘 입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염치가 있는 것이고, 체면을 존중하는 것이고, 나를 보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어쨌든 입는 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우리는 입고, 먹고, 집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합니다. 심지도 거두지도, 길쌈도 안 하지만 잘 살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기르시기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사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엄마의 따뜻한 자장가처럼 들립니다. 염려하지 말라, 새를 봐라,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잘 돌보고 계시느냐. 그러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럼 문제가 많은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려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책임적으로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을 위한 준비나 설계는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처럼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낮의 해처럼 밤의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려면 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게 어떻게 가당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염려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해도 염려는 백해무익하고 비생산적이라는 것이 주님의 생각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보다 평균 신장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염려해서 키를 키울 수 있었다면 저는 2미터도 넘었을 겁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키가 크지 않습니다. 염려는 소모적일뿐만 아니라 도움이 안 됩니다. 비생산적이고 비신앙적일 뿐입니다.

염려는 근본적으로 불신앙에서 옵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오죽 잘 먹이실까 확신하면 염려를 안 해도 되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겁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염려하는 겁니다. 아이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신뢰 때문에 아이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멀쩡한데도 아이가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한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아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염려란 믿음의 문제이고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기서 ‘믿음이 적은 자’라며 책망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처방은 이것입니다. 우선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겁니다. 22절과 28절에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새의 능력을 보라, 백합화의 자질을 보라는 겁니까? 그들의 삶의 법칙, 생존의 원리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거저 잘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겁니다. 삶의 기본적인 원리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창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우리보다 잘 살고 있습니까? 실수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알뜰히 보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라는 것이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저렇게 완전하게 돌보시는데 그것들 보다 더 귀한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이 무책임하게 버려두시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더 잘 먹이고, 더 잘 보살피겠느냐는 겁니다. 이 사실을 새와 백합화를 보며 깨달으라는 겁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공중의 새는 독수리 같은 새가 아니라, 가장 작은 새인 참새 같은 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번역상 참새이지 원래는 가장 작은 새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31절 입니다: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날아가던 새가 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이렇게 귀한데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이 관리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내 머리털인데도 그 개수를 모르는데 하나님은 아신다는 겁니다. 그만큼 완벽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돌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노심초사 하느냐는 겁니다. 공중의 새나 백합화로서는 하나님이 그저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저 피조물이 아닙니다. 미물의 자연물도 하나님이 철저히 보살피신다면 자녀된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히 보살피시겠느냐는 겁니다. 아버지 안 계신 분 있으십니까? 염려나 걱정은 자식의 몫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몫입니다. 제발 청승부리지 마시고,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아직도 내 인생을 내 힘과 내 재주로, 내 노력으로 감당하려고 하기에 우리는 날마다 염려와 걱정이고 고뇌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내 인생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용납하십시오. 하루라도 속히 모든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염려와 걱정이 해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우선순위를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는 이것이 먼저가 아니고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이 말씀하신 삶의 수순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인데, 우리는 의식주를 주장합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냐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의식주에 매인 삶을 우리는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의식주 문제로 방해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우선입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주께서 우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식주 문제가 우리 삶에서 제일 순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아마도 마지막 순위일 겁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불신자들의 삶의 전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논리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지 말라”와 “-하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꽃이나 새는 단지 염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하다가 죽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잘 먹고 잘 살자에 매어 있습니다.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먼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의식주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염려하다가 마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하루 단위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염려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루 단위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새나 꽃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그들에게는 창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그날 그날 주시는 하루분의 만나로 살았습니다. 욕심을 부려 몇일분의 양식을 거두면 다 썩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많이 쌓아 놓아야 만족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창고가 좁으면 헐고 다시 지어서라도 잔뜩 쌓아 놓아야 만족하고 이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탐욕의 화신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기도하고 봉사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고 믿는 것은 아닙니까? 실제 그런가 안 그런가는 여러분이 털어놓는 불만을 살펴보십시오. 왜 만족을 못하십니까?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불평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해, 많이 쌓아놓지 못해 불평아닙니까? 일용할 양식의 염려는 아니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지금 아래는 썩고 있는 데도 더 많이 쌓아놓지 못해 염려합니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무소유, 가난, 청빈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주님도 바울도 어거스틴도 프랜시스도, 중세의 숱한 성자들이 다 거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난이 죄이고 가장 큰 불행이고 저주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은 그 끝이 없습니다. 염려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해 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시고 탐욕에 절은 여러분의 심령을 돌아보십시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십시다. 주님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가 너의 영혼을 찾으리니 네가 쌓아놓은 저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저 공중의 새처럼, 들의 풀처럼, 낮의 해처럼, 밤의 달처럼 사십시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올해는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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