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925m: 사색의 계절( 호 1:1-9)

2011년 9월 25일 주일낮예배
본문: 호 1:1-9
제목: 사색의 계절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잘 아시는 대로 성경은 66권입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입니다. 그런데 구약 39권 가운데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록한 선지서가 16권입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입니다. 이 16권의 선지서를 다시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구분합니다.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입니다. 그리고 호세아에서 말라기까지 12권이 소선지서입니다. 왜 대선지서이고 소선지서입니까? 명성을 날렸던 큰 선지자를 대선지서로 구분할까요? 그런 구분이 아니라 책이 두꺼워서 대선지서입니다. 예언 분량이 많으면 대선지서이고, 분량이 적으면 소선지서입니다. 호세아서는 1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호세아는 소선지서에 속합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당연히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구원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인 호세아를 헬라식으로 표기하고 발음을 하면 <예수>입니다. 왜 호세아일까요? 왜 주님과 이름이 같을까요?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여기에 특별한 계시가 있습니까? 이 문제는 잠시 두고 다른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활동 무대도 북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늘 본문 1장 1절을 보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라고 합니다. 이들 왕은 남 유다의 왕들입니다. 호세아가 활동 기간을 문서로 남기며 북 이스라엘 출신임에도 남 왕국 유다의 왕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북 이스라엘 왕은 마지막에 한 사람만 소개합니다. 여로보암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에 여로보암만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여러 다른 왕들이 있었습니다. 호세아 자신은 비록 북 이스라엘 출신이지만 그럼에도 다윗 왕가 곧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남 왕국 유다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입니다. 남 왕국이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이런 사람입니다. 맹목적 소속감이나 지역감정에 휘둘린 사람이 아닙니다. 냉정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호세아 4장 1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비록 북 이스라엘은 행음을 일삼을지라도 남 왕국의 유다 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남 왕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호세아의 이런 신념이 옳았습니다. 결국 주님이 다윗의 후손 곧 유다 지파로 오십니다. 그러면 왜 그는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한 명만 언급했을까요? 다른 왕들은 다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권력의 정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왕들은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토록 그는 강직했습니다. 

이러한 강직한 선지자를 향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고멜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라는 겁니다. 날벼락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입니다. 고지식하고 강직한 사람, 전통과 정통을 따지는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는 겁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레위기 21장을 보면 원래 선지자는 과부나 이혼한 여인이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되고, 자기 백성 중 순결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다릅니다. 이때가 BC 8세기인데, 이때는 선지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요나가 다 같은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호세아에게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호세아야말로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라는 사람이 세상이 다 아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았을 때 주위 사람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호세아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요? 목사가 그 동네에서 이름난 바람둥이와 결혼해서 목회한다면 그 교회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멜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1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올 때 바깥에서 전도사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금자씨가 말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 호세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호세아가 선포를 하면, 백성들이 ‘너나 잘 하라’고 했을 겁니다. 호세아 얘기는 창작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3절입니다.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고 합니다. 고멜의 부모 이름까지 밝힙니다. 

호세아는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입니다. 그의 성품이나 정서로 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분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고멜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낳고 사는데, 고멜은 툭 하면 가출하고, 외도를 했습니다. 자식을 낳고도 돌아다녔습니다. 인신매매를 당하면 호세아가 가서 값을 치르고 아내를 사옵니다. 정말 못할 짓입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호세아는 묵묵히 끝까지 갑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황당한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신부로 삼은 겁니다. 호세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을까요? 아까 호세아와 예수가 이름이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호세아가 구약의 예수입니다. 호세아가 주님의 모형입니다.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예고편입니다. 우리는 고멜보다는 덜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멜보다 더 추하고 악합니다. 기적같이 주님이 우리를 신부로 맞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고멜이 가출하고 외도했듯이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세상을 향해 끝없이 추파를 던지고, 우상을 찾아갔습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은 다 우상입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우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멜보다 더욱 심합니다. 

여러분, 가을입니다. 사색의 계절입니다. 기도의 계절입니다. 이 사색의 계절에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합시다. 첫째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사랑, 지독한 사랑입니다. 고멜보다 더 천하고 악한 나를 주님이 당신의 아내로,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충격적인 사랑이며 기적같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은 것이 창작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이었듯이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사색합시다. 주님의 그 지독한 사랑을 사색합시다. 주님의 신부가 된 이후에도 계속 외도함에도 주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원위치 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보다 얼마든지 더 사랑하는 게 있음에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랑을 이 가을에 우리가 좀 더 피부로 체험합시다. 둘째는 그 강직하고 철저한 호세아가 고멜을 자기의 신부로 맞아 부부로 살면서 얼마나 아픈 경험을 많이 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아픔이 처절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도 늘 아픔을 겪고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거저 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모진 쓴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괴롭히면 주님을 다시 못 박는 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때문에 끊임없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호세아처럼 주님도 우리를 신부로 삼고 사랑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아픔을 겪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많이 얘기를 하면서도 주님의 아픔에 대해서는 그다지 얘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외도하는 우리 때문에 지금도 주님은 모진 아픔을 겪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가을에 이 두 가지를 깊이 묵상하십시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Uzr9eA99x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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